tvN 드라마 <도깨비>촬영 현장│ 유튜브
일본 일간지 〈아사히 신문〉은 최근 글로브(GLOBE)라는 지면을 통해 일본에 불고 있는 한류에 대해 특집기사를 실었다. 글로브는 〈아사히 신문〉이 매달 별지 형식으로 발행하는 특집 지면이다. 매달 이슈가 되는 사안을 기사로 싣고 일본 언론의 입장과 시각을 제시한다. 주제 선정이나 주장이 편협하지 않고 일본 사회가 한번쯤 고민해봐야 할 의제와 여러 의견을 실어 독자들에게 생각할 계기를 마련해준다. 글로브는 일본 내에서도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최근 글로브에 실린 한류 특집 제목은 ‘한류의 늪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였다. 지금도 쏟아지는 많은 한류 관련 기사 속에서 이 특집이 눈길을 끈 건 늪이라는 표현과 그에 따른 표제였다. “한국 드라마나 영화, 음악이 세계를 석권하고 있습니다. 우리를 늪에 끌어들인 매력적인 콘텐츠들이 왜 계속해서 생겨날까요?”라는 표제는 도발적으로 들리기까지 한다. 많은 단어 중에 왜 부정적으로 느낄 수 있는 늪으로 한류 열풍을 표현했을까? 일본 사회에서 느끼는 한류에 대한 불편한 입장을 늪이라는 상징적 단어로 드러낸 것은 아닐까? 이 기사는 기존의 찬양이나 비판 일색으로 치우친 보도가 아니라 객관적인 시각에서 한류를 보고 있다는 점에서 한번쯤 살펴볼 만한 보도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나라 전통 문화를 세계에 홍보하기 위한 전략으로 K-팝을 활용하거나 우리나라 특유의 열성팬(팬덤) 문화가 K-팝 흥행의 가장 큰 원동력이면서 약점이 될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한 기사 등등 한류의 여러 면을 객관적으로 본 기사 중에서 필자의 눈길을 끈 대목은 ‘남녀 반반인 제작진, 여성이 만들어내는 한국 영화의 기세’였다.
양성평등 제작 현장이 한류의 성공 요인
핵심 내용은 이렇다. “최근 한국 영화나 드라마 제작 현장에 여성 스태프의 비율이 늘고 있다. 단순히 여성 스태프 수의 증가를 떠나 제작팀의 핵심 영역인 감독이나 시나리오 작가의 여성 비율도 늘고 있다.” 글쓴이는 “남성 위주의 제작 환경에 여성의 비율이 높아지면서 더 입체적이고 다양한 관점을 살릴 수 있고 여성 제작진이 제작 현장에서 활약하는 것을 신기하게 여겨 취재하는 일이 적어도 한국에서는 시대착오적인 일이 될 것”이라고 전한다.
이 기사를 주목한 이유는 우리나라 콘텐츠 업계에서 여성의 활발한 활동을 우리나라 콘텐츠가 세계 여러 곳에서 선전할 수 있는 성공 요인으로 들었다는 점이다. 이는 일본 사회 전반에 만연해 있는 여성 차별에 대한 자아비판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실제로 우리나라 콘텐츠 업계는 다른 산업 분야보다 여성 진출이 활발하다. 콘텐츠 산업 통계 보고에 따르면 2020년 말 기준으로 콘텐츠 산업 내 여성 비율이 증가세다. 전년 대비 남성은 0.8% 증가한데 비해 여성은 8.1%나 늘었다.
현장에서도 여성 인력이 예전보다 많이 늘었다는 의견이 많다. 지금까지 제작 현장에서 제한적인 일만 맡았던 것에 비해 최근에는 특수효과나 조명 같은 그동안 남성 고유의 영역으로 여겨졌던 분야에도 여성 제작진들이 자주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반면 일본 콘텐츠 업계는 여전히 남성 위주의 세계다. 도제 형태의 습직(제자들에게 자리를 물려주는 것) 풍습이나 감독을 현장의 기둥이나 아버지처럼 여기는 가부장적인 편견, 투자자나 배급사들이 가지고 있는 여성 제작진에 대한 뿌리 깊은 불신 등의 이유로 제작 현장에서 여성이 기피되고 있다.
한 조사에 따르면 2020년 기준 일본 장편 상업 영화의 여성 감독 비율은 6%에 불과하다. 여성을 위한 여성영화조차 남성 감독이 촬영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현실을 보며 많은 영화나 드라마 업계 관계자는 이것이야말로 일본 콘텐츠 업계가 경쟁력을 가지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라며 소리 높인다. 일본 영화의 다양성을 위한 가장 중요한 과제로 콘텐츠 업계의 유리천장을 깨는 것을 당면 과제로 생각해야 한다는 의견이 고개를 들고 있는 것이다.
고용 소외계층이 우리나라 콘텐츠 산업 이끈다
일본 콘텐츠 업계 관계자들은 우리나라가 2000년대 초반부터 콘텐츠 산업을 국가 핵심 산업으로 삼고 작품 제작 지원과 같은 일차적인 지원을 넘어 산업 구조 개선이나 여성 등 고용 소외계층에 대한 고용 창출 인프라 측면까지 고려했다는 것을 높게 평가한다. 그들은 한류가 한두 작품의 흥행 성공이 아니라 산업 구조를 변화시켜 이뤄낸 것이라고 분석한다. 그 근거로 여전히 남성 위주 작가로 구성된 일본보다 우리나라는 여성 작가가 주도 한다는 점을 예로 들면서, 일본에서 많은 인기를 끌고 있는 우리나라 드라마의 대부분이 여성 작가들의 작품이고 우리나라 드라마가 유독 여성에게 인기 있는 이유를 여기에서 찾았다.
사실 남성 위주의 제작 환경보다 여성과 남성이 어울린 제작 환경이 더 창의적이고 다양한 시각을 반영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거기에 하나 덧붙이자면 다른 산업 분야보다 청년들의 활동이 두드러지는 곳이 콘텐츠 산업이다. 실제로 경력자들의 경험에 청년들의 창의성이 결합돼 시너지 효과를 내는 경우가 많다. 일본 콘텐츠 업계 관계자 사이에서 정부 주도의 우리나라 콘텐츠 산업 진흥 정책을 ‘신의 한 수’였다고 부러워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문동열 콘텐츠산업 칼럼니스트_ 일본 게이오대학 대학원을 졸업하고 기업에서 방송, 게임, 영화 등 다양한 콘텐츠 기획과 제작을 해왔다. 현재 콘텐츠 제작자로 활동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