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0년 아카데미상 시상식에서 봉준호 감독은 영어권 국가의 관객들이 비영어권 영화들을 선호하지 않는 현실을 꼬집는 수상소감으로 화제가 됐다.│ 유튜브
“1인치 자막의 장벽을 뛰어넘으면 훨씬 더 많은 영화를 즐길 수 있다.”
2020년 아카데미상 시상식에서 봉준호 감독이 수상 소감에서 한 말이다. 영어권 국가의 관객들이 영문 자막이 필요한 비영어권 영화들을 선호하지 않는 현실을 꼬집은 말이다. 아카데미상이 그간 비영어권 영화에 인색했다는 것도 포함한 의미이기도 하다. 봉준호 감독의 수상 소감처럼 ‘1인치 자막의 장벽’은 모든 비영어권 국가 콘텐츠에 있어서 큰 진입 장벽이다. 지금도 실시간 전 세계로 뻗어나가며 승승장구하는 한류도 마찬가지다.
세계 곳곳에 부는 한국어 열풍
매년 전 세계의 언어 순위를 발표하는 학술지 <에스놀로그>에 따르면 현재 전 세계에서 사용하는 언어 수는 7139개다. 이 중 모국어 외에 제2언어로 사용하는 인구까지 포함하면 한국어의 언어 순위는 20위다. 20위라 해도 인구수로 따지면 8200만 명 정도로 전 세계 인구의 1% 남짓한 수준이다.
가장 많이 쓰는 언어는 영어다. 모국어 사용자만 본다면 중국어의 3분의 1 수준이지만 제2언어 사용자까지 합하면 전 세계에서 13억 명이 넘는 인구가 영어를 사용한다. 중국어는 11억 명, 힌디어는 6억 명이지만 중국어와 힌디어는 중국과 인도의 인구수에 기인한 것이고 영어는 전 세계 곳곳에서 사용된다. 영어가 공용어 또는 그에 준하는 수준으로 쓰이는 나라만 146개국이다.
언어와 문화는 상호 밀접한 관계가 있다. 커뮤니케이션의 기반이 되는 언어는 문화 전달에 있어 핵심 역할을 한다. 실제로 미국 문화가 세계를 주름잡는 이유도 중국어나 힌디어같이 특정 국가에 뭉쳐 있는 것이 아니라 전 세계에 고르게 퍼져 있기 때문이다.
어떤 언어를 제2언어로 선택하는 기준이 국력에 비례하는 것 역시 그렇다. 모국어가 아니라 제2언어로 영어를 쓰는 사람들이 2020년 기준 9억 7000만 명에 달한다. 이른바 문화 패권에 언어가 어떤 역할을 하는지 잘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이렇듯 언어는 문화의 힘을 유지시키고 키우는 가장 큰 원동력이다. 그런 점에서 최근 전 세계 곳곳에서 한류로 인해 한국어 배우기 열풍이 일고 있는 것을 보면 한류가 찻잔 속의 태풍이 아닌 크고 긴 흐름이 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한국어 배우기 열풍은 한류의 시작과 함께한다. 대표적으로 한국어를 모국어로 하지 않는 사람을 대상으로 치르는 한국어능력시험(TOPIK)만 봐도 실시 첫해인 1997년 4개국에서 2692명이 응시했다. 2019년에는 37만 명을 넘어 22년 동안 무려 137배가 늘었다. 거기에 2020년 전 세계에서 인구가 두 번째로 많은 인도가 한국어를 정규 교육과정으로 가르친다고 밝혔다.
전문가들은 이에 대해 우리 정부의 노력과 함께 2019년부터 불어닥친 한류의 영향이 컸다고 말한다. 베트남도 2021년부터 한국어를 필수 외국어 교육과정인 제1외국어로 선정해 초등학교 3학년부터 교육할 수 있도록 했다. 2020년부터 러시아나 아랍, 동유럽, 터키 등 다양한 국가에서 한국어 붐이 불었다. 많은 전문가는 이런 현상이 2020년부터 다시 일어난 한류 열풍과 무관하지 않다고 해석한다.
한국어 열풍, 한류의 순항 ‘청신호’
외국어를 배우는 가장 빠른 길은 그 나라의 문화에 빠지는 것이다. 실제로 어느 나라의 문화를 좋아하고 접하다 보면 그 나라의 언어가 익숙해지고 그 언어를 자연스럽게 습득하게 된다. 일본 유학 시절 한 일본인 지인은 한국어가 제법 유창했는데 어디서 배웠냐고 물어보니 한국 드라마를 보고 배웠다고 했다. 정규 교육이 아닌 드라마로 독학을 하다 보니 의외로 젊은이들이 쓰는 최신 유행어를 꿰고 있거나 가끔 사극에서나 나올 법한 옛말을 쓰기도 해서 웃었던 기억이 난다.
콘텐츠 시장에서 같은 언어를 쓴다는 것은 동일 경제권에 있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본다면 영어를 주 언어로 하는 콘텐츠들이 전 세계 시장에서 주류를 차지하는 이유를 알 수 있다. 다시 말해 한국어가 퍼져 나갈수록 한류의 생명력은 더욱 길어지고 강해질 것이라는 뜻이다.
2020년 한국국제교류재단과 외교부에서 발간한 ‘2020 지구촌 한류 현황’에 따르면 2020년 기준 전 세계에 있는 한류 팬의 인구는 1억 400만 명이다. 한류 팬들이 모두 한국어에 능통하진 않겠지만 분명 해외에는 K-콘텐츠로 한국어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1억 명 넘게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최근 해외 한류 팬 사이에서 ‘돌민정음(아이돌과 훈민정음의 합성어)’이 유행이라고 한다. 영어 단어 일부를 한글 로마자 표기로 사용하는 것이다. 오빠를 ‘Oppa’, 볼수록 매력이라는 뜻의 ‘볼매’를 ‘Bolmae’, 애교를 ‘Aegyo’로 쓴다. 한국어가 최소한 한류 팬 사이에서 세계 공용어로 자리 잡아가고 있는 모습이다.
이런 분위기에서 2020년 9월 문화체육관광부가 발표한 ‘한국어, 세계를 잇다 한국어 확산계획(2020~2022년)’은 시기적절하다. 좀 더 거시적이고 장기적인 안목에서 한국어를 확대하고 이로써 한류가 영속적으로 우리나라의 미래 성장 동력으로 자리 잡을 수 있게끔 지원하는 좋은 정책이다. 한류가 퍼져 나가고 한국어에 익숙한 세대가 점점 늘어갈수록 한류와 함께 우리의 국가경쟁력 역시 더욱 커지고 강해질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문동열 콘텐츠산업 칼럼니스트_ 일본 게이오대학 대학원을 졸업하고 기업에서 방송, 게임, 영화 등 다양한 콘텐츠 기획과 제작을 해왔다. 현재 콘텐츠 제작자로 활동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