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2년(선조 25년) 4월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일본군 대장 가토 기요마사 휘하에는 날랜 무술 솜씨를 지닌 선봉장 사야가(沙也加)가 있었다. 그러나 이로부터 며칠 후 사야가는 일본군을 향해 돌진하는 조선군 장수로 변해 있었다. 사야가는 경상 병사 박진에게 귀순한 후 경주, 울산 등지에서 일본군의 침공을 막는 데 공을 세웠다. 일본군 선봉장으로 활약했던 만큼 적의 동향을 누구보다 잘 알았기 때문이다.
▷2012년 6월 10일 대구 달성군 가창면의 달성한일우호관(녹동서원)을 찾은 일본인 관광객들이 김충선 장군의 밀랍인형을 보고 있다.
사야가는 1593년 4월의 이견대전투, 1597년 11월 정진전투 등에 참가해 큰 공을 세웠고, 선조는 그에게 김충선(金忠善)이라는 이름을 하사했다. 김충선은 말년에 지금의 대구 달성군 가창면 우록동에 거처하면서 우록 김씨 시조가 됐다. 또 다른 항왜(降倭 : 조선에 투항한 일본군)인 김성인(金誠仁)은 함박 김씨 시조가 됐다. 당시 조선에 투항한 일본인을 ‘항왜’라 칭했고, 이들 중 상당수는 조선 군대에 배치됐다. 항왜는 ‘투항왜’, ‘순왜(順倭)’, ‘도왜(逃倭)’, ‘피로왜(被擄倭)’ 등으로도 불렸다.
전쟁 초기 조선 정부는 생포한 일본군 포로와 항왜를 대부분 처단하는 진살(盡殺) 정책을 취했다. 일본군에 당했다는 복수심도 컸고, 이들이 조선의 군사기밀과 정보를 일본에 알릴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점차 항왜가 늘고 김충선과 같은 항왜들이 화포 및 조총 기술 능력을 발휘하자 1593년 부터는 이들을 적극 활용하는 방향으로 정책을 바꿔나갔다.
1593년 3월 선조는 항왜에게서 염초 제조법을 익히게 했고, 명나라에 항왜의 존재를 비밀로 하면서 염초와 조총 기술을 전수받기도 했다. 검술 실력이 뛰어난 항왜들은 따로 독립 부대를 만들어 ‘투순군(投順軍)’이라 하고, 전투에 투입시켰다. 1595년 6월 <선조실록>엔 여여문(呂汝文)이라는 항왜가 아동으로 조직된 아동포살수대(兒童砲殺手隊)에 왜검(倭劍)을 가르쳤다는 기록이 보인다. 항왜들은 북방 여진족 토벌이나 경기 지방의 토적 소탕에도 참여했으며, 1624년 이괄의 난을 진압하는 데 특히 큰 활약을 했다.
항왜는 대일(對日) 정보 수집에도 활용됐으며 일본군 진영에 들어가 적군을 회유하기도 했는데, 정유재란 시기인 1597년 3월 24일 항왜 남여문(南汝文)은 적진에 들어가 그 우두머리를 설득해 숨어 있던 일본군 80여 명을 체포하는 데 공을 세웠다.
1597년 8월 충청 병사 이시언(李時彦)은 상주에서 항왜 15명을 이끌고 일본군을 공격했는데, 그중에서 산록고(山祿古), 사고소(沙古所)의 공이 가장 컸다고 보고했다. 명량대첩의 승리 때 이순신 장군 휘하에 있었던 항왜 준사(浚沙)는 2014년 영화 <명량>에 비중 있게 등장했다.
항왜가 있었던 반면 일본군에 투항한 조선인도 있었다. <징비록>엔 평양성 전투에서 일본군에 협조한 세작(細作:간첩) 김수량을 유성룡이 직접 참수한 기록과 함께 숙천, 안주, 의주에 이르기까지 40명이 넘는 세작이 있었다는 기록이 전한다. 전쟁 상황에서 생존을 위해 조국을 등지고 자국의 군사에게 총과 칼을 겨눠야 했던 사람들의 존재는 필연일지도 모른다. 그만큼 항왜의 존재는 전쟁의 또 다른 상처를 보여준다.
글 · 신병주 (건국대 사학과 교수) 2015.6.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