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왕실에서 왕자나 공주가 태어나는 것은 국가의 큰 경사였다. 조정은 곧바로 ‘태실도감(胎室都監)’이라는 관청을 임시로 설치했다. 태실도감에서는 8도 관찰사들에게 명당을 찾아 올리라는장계를 보냈고, 풍수지리에 능한 지관을 각 지역에 보내 실사를 벌였다. 왕실의 태를 묻을 태실(胎室)을 조성하기 위해서였다.
예부터 태는 사람의 생명력이 담긴 것으로 보아 귀중히 여겼고, 조선 왕실에서는 태를 국운과 관련된 것으로 생각했다. 일반인들이 태를 묻는 것을 금지하는 ‘장태법’까지 제정해 태의 주인공인 왕가의 자손이 무병장수하고 왕실의 무궁한 계승 발전을 기원했다. 왕세자나 왕세손의 태는 일정한 의식과 절차를 밟아 특별히 석실에 보관해 각별히 관리했다.
"왕실의 태를 묻은 산을 태봉산이라 했다. 태실은 ‘애기능’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요즘으로 말하면 제대혈 보관소인 셈이다. 태봉산은 좁은 의미로 왕실의 태를 묻은 산이지만, 민간에서 태를 묻은 산도 넓은 의미로 태봉산이다. 태봉산은 지도에 오르지 않은 것까지 포함해서 수도 없이 많다."
향토사학자이자 서삼릉태실연구소장인 저자는 오랫동안 조선 왕조 태실의 역사적 연원과 가치를 조명하는 일에 팔을 걷고 나서왔다. 전국의 태실은 물론 태봉산과 태봉산 관련 마을 등을 빠짐없이 답사하고 기록을 하고 있다. 태실이 갖는 중요한 문화적 가치를 널리 알리는 것은 물론 태실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다.
조선 왕릉이 도읍지에서 100리 안팎에 조성된 것에 비해 태실은 전국 방방곡곡에 조성됐다. 왕조의 은덕을 일반 백성에게까지 누리게 한다는 의도, 즉태실도 일종의 통치 이데올로기였다. 이 때문에 태실 관리에 정성을 기울였다. 각 고을은 태실을 서로 자기 고장에 유치하려는 노력도 벌였다.
태실이 조성되는 지방은 세금과 노역을 덜어주는 혜택까지 주었기 때문이다. 조선 왕실의 태실이 수난을 받기 시작한 것은 일제강점기 시절이다. 1929년 일제는 우리나라 전역의 태실을 발굴하고 태가 든 항아리를 경기 고양시 서삼릉에 옮겨 관리했다. 이곳에는 국왕 태실 20기, 왕자 태실 19기, 왕녀 태실 13기, 왕손 태실 2기 등 총 54기가 모여 있다.
서삼릉 태실과 함께 경북 성주군 월항면 인촌리 ‘세종대왕자 태실’은 세종대왕이 낳은 17왕자와 손자 단종 등 19기의 태실이 모두 한곳에 조성돼 있다. 이곳은 조선 왕조 태실 중 규모가 가장 크며 원형이 잘 보존돼 있다. 백성들의 부역과 묘지 이장의 고충을 덜기 위해 세종이 내린 결단 덕분이다. 전국의 태실은 풍수지리적으로 명당 중의 명당에 자리했다. 만일 백성이 왕실의 태봉에 자신의 후손의 태를 묻었다는 사실이 발각되면 귀양 등 중벌을 각오해야 했다. 그러나 조선 유일의 16년간 육아일기〈양아록(養兒錄)〉을 남긴 조선 중기 문신 이문건은 남몰래 손자 이수봉의 탯줄을 태봉에 묻는 간 큰(?) 행동을 하기도 했다.
저자는 "조선 왕조 태실도 왕릉 못지않은 귀중한 문화유산"이라며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 가치를 인정받는 그날까지 지속적인 학술 연구가 이루어져야 한다"고 말했다.
조선의 세계적인 문화유산 태실(胎室)
김득환 지음 | 책읽는사람들 | 365쪽 | 1만9800원
글 · 윤융근 (위클리 공감 기자) 2016.0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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