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메르스(중동호흡기질환) 사태로 온 나라가 큰 수난을 겪고 있다. 유행 초기 적절하지 못한 대처와 안전 불감증, 한국식 병원 문화 등이 겹쳐 걷잡을 수 없는 사태로까지 확산됐다. 외국인 관광객의 한국 방문 취소가 줄을 잇는가 하면 경기가 침체돼 경제적으로도 큰 손실이 발생하고 있다.
▷조선의 인현왕후(효종비)가 딸 숙휘 공주에게 보낸 새해 덕담 한글 편지. 딸이 앓던 병에서 회복된 것을 기뻐하고, 손자들이 천연두를 이겨내고 80세까지 산다며 완료형으로 표현했다.
현대에도 쉽게 제어하지 못하는 감염질환(전염병)의 대유행은 의학이 발달하지 못한 전통시대엔 그야말로 공포의 대상이었다. 감염질환 즉 역병(疫病) 또는 역질(疫疾)에 관한 기록은 <조선왕조실록>에도 1000여 건 이상 나온다. 최초의 기록은 1393년 3월 경기 양주 회암사에서 수개월간 역질이 계속돼 승려들이 희생되고 왕사(王師)인 자초가 광명사로 거처를 옮긴 것이다.
1411년(태종 11) 5월엔 “봄에서 여름으로 바뀌는 동안 경외에 역질이 돌아 백성들이 많이 요사(夭死)하였다”고 했고, 1422년(세종 4) 3월엔 “이달에 서울과 지방에서 큰 역질이 있어 죽은 사람이 매우 많았다”고 하는 등 감염질환의 유행은 끊이지 않았다.
1750년(영조 26) 팔도에 역질이 성해 죽은 자가 즐비하자 영조는 즉시 하교를 내려 “죽은 자는 방법을 다하여 거두어 묻어주고 산 사람은 특별히 구원하여 살려내라”면서 사망자의 시신 수습과 생존자의 구휼정책에 나섰다. 조선 후기의 주된 전염병은 콜레라, 두창, 성홍열, 장티푸스, 이질, 홍역 등이었다. 이 중에서도 가장 무서웠던 것은 콜레라와 ‘마마’로도 불렸던 두창(천연두)이었다.
역병을 극복하기 위한 대책들도 수립됐다. 당시에도 역병이 유행하면 환자나 시체를 도성 밖으로 추방하는 조처를 일단 취했다. 성 밖에서 역병에 걸린 환자를 전담하던 곳은 활인원(活人院 : 후에 활인서라고 함)이었다. 동소문 밖에 동활인서를, 서소문 밖에 서활인서를 두고, 의원(醫員)과 의무(醫巫)를 배치했다. 평소엔 무의탁 병자를 돌보는 일을 맡다가 역병이 유행하면 따로 여막(廬幕)을 가설해 환자들을 보살폈다. “전염병은 사람이 피하고 꺼리는 것인데, 활인원 의원으로서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사람을 살린 자는 관직을 주라”는 기록에서 당시에도 감염질환의 최전선에 나선 의원들을 우대한 모습을 엿볼 수 있다.
무당이 나서서 굿을 하기도 했고 역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여제( 祭)도 적지 않았다. 1708년(숙종44) 3월 숙종은 “역질이 치열하게 만연되었기 때문에 높은 신하들을 산천과 성황당에 보내 제사를 지내게” 했다. 하지만 굿을 하고 제사를 지내도 역병의 유행을 근원적으로 해결할 수 없었고, 점차 의학적인 방법이 개발됐다. 허준은 광해군의 두창을 치료해 명의(名醫)의 반열에 섰으며, 정약용은 천연두에 관한책인 <마과회통>을 남겼다. 근대에 들어와 지석영은 1885년 <우두신설(牛痘新說)>을 저술해 난공불락과도 같았던 천연두의 벽을 무너뜨리는 데 공헌했다.
감염질환의 악몽은 의학의 발달과 위생 관념의 강화로 사라지는 추세지만, 메르스처럼 강한 내성으로 무장한 새로운 바이러스들이 또다시 인체에 대한 공격에 나서기도 한다. 올봄과 여름 한국 사회를 뒤흔든 메르스 사태를 반면교사로 삼아 체계적이고 종합적인 대책을 세워나가야 할 것이다.
글 · 신병주 (건국대 사학과 교수) 2015.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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