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대해선 잘 알아도 임진왜란 때 임시정부가 있었다는 사실은 모르는 사람이 많다. 1592년 임진왜란이라는 국난을 당해 선조 임금은 광해군으로 하여금 분조(分朝)를 이끌게 했다. ‘분조’는 ‘조정을 둘로 나눈다’는 뜻으로 사실상 임시정부 성격을 띤다.
국왕인 선조에게 변고가 생기면 광해군에게 정부를 계속 이끌게 한다는 뜻도 담겨 있다. 1592년 6월 11일 평양성이 함락된 후 선조는 서북쪽으로 피난길을 재촉했다. 6월 13일엔 요동으로 건너가겠다는 뜻을 밝히면서 세자인 광해군에게 국사를 임시로 다스릴 것을 지시했고, 6월 14일 분조가 구성됐다. 선조는 광해군에게 강계로 향할 것을 명하면서 영의정 최흥원, 병조판서 이헌국, 우찬성 정탁 등 15명의 대신들로 하여금 광해군을 수행케 했다.
▷경기 남양주시 광해군 묘. 조선 15대 왕 광해군(재위 1608~23)과 문성군부인 유씨의 무덤이다. 봉분이 두 개인 쌍분이며, 무덤 주변에는 석물들이 있다.
정탁(鄭琢, 1526~1605)은 당시의 상황을 기록한 <피난행록(避亂行錄)>을 남겼는데, 이를 통해 당시 정황과 분조 활동을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 광해군의 분조는 6월 14일 영변을 떠나 맹산, 양덕, 곡산 등을 거쳐 7월 9일 강원도 이천(伊川)에 도착해 그곳에서 20일간 머물렀다. 여름철이어서 자주 비가 내렸고 광해군 일행은 민가에서 자거나 노숙을 하면서 어려움을 견뎌냈다.
자신의 안위를 위해 중국 요동 지역으로 피난 가는 선조의 모습과는 대조적으로, 광해군은 일본군이 사방을 둘러싼 전장(戰場)에서 경험 있는 관료들의 보좌를 받으며 전시 정부를 지휘했다. 이천은 분조가 출발한 영변에서 남쪽으로 265㎞ 떨어진 전략적 요충지. 한양과의 거리는 불과 128㎞로 한양 수복에도 중요한 지역이었다.
광해군의 분조가 자리를 잡자 피난을 갔던 관리들이 모여들고 의병을 규합해 분조에 합류하는 사람들도 생겨났다.
7월 17일의 <피난행록>엔 “평양을 지키지 못한 이후부터 온 나라 백성들이 대가(大駕)가 있는 곳을 알지 못하여 크게 우러러 전하를 사모하고 슬퍼하고 있다가, 동궁께서 오셨다는 소식을 듣고 인심이 기뻐하며 마치 다시 살아난 것 같았습니다. 도망쳤던 수령들도 점차 관직으로 돌아오고 호령 역시 행하여져 회복의 기회가 조금씩 가망이 있습니다”라고 당시 분위기를 전한다.
7월 27일의 기록에도 “경기도의 의병들이 곳곳에서 봉기하여 서로 앞을 다투어 적을 잡아서 적세가 조금 꺾이고 있습니다”라며 분조가 의병 봉기의 컨트롤타워임을 언급했다.
분조가 적극적인 항전 활동을 하던 시기에 드디어 명나라 원병이 조선에 도착했고, 1593년 1월 8일 마침내 조(朝)·명(明) 연합군이 평양성을 수복했다. 그러자 선조는 더 이상 분조가 필요하지 않다고 판단하고, 광해군에게 대조(大朝)와 합할 것을 명했다.
1592년 6월 14일 구성돼 전쟁의 최전선에서 활약한 분조가 7개월 만에 해체되는 순간이었다. 비록 짧은 기간이었지만 7년간의 임진왜란 중 가장 치열한 격전이 벌어진 시기가 1592년 4월부터 1593년 4월까지의 1년여임을 감안하면 분조는 가장 중요한 시기에 큰 구실을 했음을 알 수 있다. 일제강점기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있었던 것처럼 임진왜란 때 광해군이 이끄는 임시정부 ‘분조’가 있었다는 역사는 기억해둘 필요가 있다.
글 · 신병주 (건국대 사학과 교수) 2015.6.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