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년보다 빨리 꽃을 피운 왕벚나무들이 함박눈처럼 꽃잎을 날리던 날, 저는 서울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어느 강변의 습지를 찾아갔습니다. 아직 찬 기운이 가시지 않은 날씨지만 남쪽에서 불어오는 봄바람은 솜뭉치처럼 부서진 부들의 씨앗들을 마른 갈대 사이로 어지러이 날리고 있더군요. 이곳 물가에는 갯버들 꽃이 한창입니다. 먹이가 부족한 이른 봄 고맙게도 무료 급식소가 문을 연 덕분에 등에류와 벌들도 덩달아 바빠졌습니다. 조만간 키버들과 선버들마저 꿀을 담뿍 머금은 향기로운 꽃을 피워내면 이곳은 온통 난리가 날 것입니다.
물가에 열을 지어 선 각종 버드나무들의 연둣빛 자태를 감탄하며 바라보고 있자니 만일 우리나라에서 ‘생명의 나무’를 꼽으라면 응당 버드나무가 그 주인공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버드나무(류)는 그야말로 이 세상에 ‘아낌없이 주는 나무’이니까요.
강변에 늘어선 버드나무들은 토양의 침식을 막아줄 뿐더러 수질 정화에도 도움을 줍니다. 풍성하게 피는 향기로운 꽃들은 굶주린 곤충들이 춘궁기를 이겨내도록 밤낮없이 넉넉하게 꿀을 내놓습니다. 또한 이처럼 곤충이 많이 모이다 보니 이곳은 보금자리와 먹이가 필요한 작은 새들이 모여드는 곳이기도 합니다. 이런 이유로 봄철의 버드나무 숲은 그야말로 생명의 발원지 같다는 생각마저 들게 합니다. 이 아름다운 곳에서 저는 문득 머나먼 두만강변의 버드나무 숲을 떠올려 보았습니다.
18세기 정조 재위 시절 홍양호(洪良浩)라는 지혜롭고 유능한 관리가 있었답니다. 그는 1777년 세도정치의 희생양이 되어 잠시 두만강변을 관할하는 경흥부사로 좌천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한직에서 적당히 시간을 때우며 소일하는 대신에 장정 7,500명을 동원하여 1인당 5주의 버드나무를 두만강변에 심는 큰 공사를 벌였다고 전해집니다. 옛날에는 변방의 생활이라는 것이 지금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힘들었을 것입니다. 먹고 살기도 어려운 판에 별로 중요해 보이지 않는 일로 강제 노역까지 하게 되었으니 백성들의 원성이 그야말로 하늘을 찔렀겠지요. 이를 보고 걱정한 친구가 홍양호를 간곡히 만류합니다.
“여보게, 자네는 여기 잠시 있다가 한양으로 다시 돌아갈 사람이 아닌가? 왜 공연한 일을 벌여서 긁어 부스럼을 만드는가?”
현실적이고 애정 어린 친구의 충고에 대한 홍양호의 답변이 그의 저서 <이계집(耳溪集)>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대략적인 요지는 이렇습니다.
“이제 내가 버드나무(류)를 심는 것에는 다섯 가지 이로움이 있어요.
첫째는 우리 강역을 (오랑캐로부터) 은폐하기 위한 것이요,
둘째는 말을 타고 돌격하는 것을 막기 위한 것이요,
셋째는 강둑이 물살에 파 먹히는 것을 대비하기 위한 것이요,
넷째는 땔감용 나무를 대기 위한 것이요,
다섯째는 바람을 막기 위한 것이지요.
이 공사는 이처럼 백성들을 이롭게 하는 일이라오. 내가 비록 여기 오래 머물지 않을지 몰라도 몇 년 지나지 않아 백성들이 그 이익을 누리게 될 것이고, 그 이로움이 백년, 천년을 갈 수도 있을 텐데 내가 어찌 눈앞의 인기에 영합하여 이 일을 미루겠소?”
그 탁견에 감탄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자연 생태에 대한 정교한 지식 체계가 없던 그 옛날에도 슬기로운 우리 선조들은 강변을 지키는 버드나무숲의 중요성을 간과하지 않았던 것이죠. 이런저런 허황한 명분에 휩쓸려 오랜 세월 우리 곁을 지켜주었던 강변의 버드나무들이 하루 아침에 베어져 나가고 삭막한 콘크리트 제방이 그 자리에 들어서고 있는 답답한 작금의 현실을 목도하자니, 자연환경 보존과 실용성을 두루 배려했던 옛 선조들의 지혜가 더욱 절실해지는 요즈음입니다.
하천변에는 마땅히 버드나무숲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이 고마운 나무들은 매년 봄마다 크고 작은 물줄기를 따라 세상을 황금빛으로 수놓을 것이며 전국 방방곡곡에는 생명의 교향곡이 우렁차게 울려 퍼질 것입니다.
글과 사진·김태영(자연생태연구가·<한국의 나무> 공저자) 2014.04.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