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도 일반인들은 윤인호라는 이름을 들어본 적이 없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지만 곤충 연구가들 사이에서 고(故) 윤인호(1922~2004) 선생은 유명한 인물이랍니다. 나비를 연구하는 사람들은 한국에 많이 있지만 선생에게는 남다른 점이 있었습니다. 나비 표본에나 열중하는 평범한 채집가들과는 달리 선생은 식물에 대해서도 이해가 깊어 자연의 오묘한 리듬을 거시적으로 바라보는 시야를 갖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오늘날에조차도 국내의 나비 연구가들 중에서 자연을 보는 시야가 선생만큼 트인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윤인호 선생의 특출한 점은 또 있습니다. 선생은 자신이 힘들여 체득한 귀중한 지식과 정보를 주변 사람들과 나누는 것을 아까워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여기 풍게나무가 한 그루 서 있습니다. 나비 애벌레들에게 가장 인기가 좋은 나무인 풍게나무는 나비 연구가들에게는 아주 중요한 식물입니다.
쭐나비, 홍점아락나비, 흑백알락나비, 왕오색나비 등 6종이나 되는 나비들이 풍게나무를 비롯한 팽나무류의 잎을 먹이식물로 삼고 있어서입니다. 많은 애벌레들이 모여 사는 풍게나무는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요? 그건 풍게나무가 나무들의 규칙을 충실히 지키고 있기 때문입니다.
나무들의 규칙이란 나무들이 열 개의 잎을 생산했을 때 각각 어디에 쓰려고 만드는가에 대한 규칙이랍니다. 두 장의 나뭇잎은 나무가 자라기 위해, 두 장은 꽃을 피우기 위해, 두 장은 씨앗을 만들기 위해, 두 장은 자기 자신을 지키기 위한 물질을 만들기 위해, 그리고 두 장은 숲속 다른 동물들을 먹이기 위해 만든 것이랍니다. 애벌레들이 풍게나무가 만드는 모든 잎 중에서 숲속 동물들을 위해 준비한 양만큼만 먹는다면 풍게나무는 아무 문제없이 건강하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또한 풍게나무에 사는 애벌레들 사이에도 정해진 규칙이 있답니다. 많은 종류의 애벌레가 모조리 나뭇잎을 먹으려고 몰려들면 먹이를 많이 먹기 위해 다른 종류의 애벌레와 싸워야 하고, 그렇게 되면 애벌레의 소중한 먹이인 풍게나무도 살기 힘들어집니다. 그래서 어떤 애벌레가 많은 양의 잎을 먹을 때쯤이면 다른 애벌레는 번데기로 변해 있거나 아니면 나비로 변하는 등 서로 활동하는 시기들이 다릅니다. 나비 애벌레들 사이에도 나무와 더불어 사는 규칙이 있는 셈입니다.
시대를 앞서갔던 윤인호 선생은 집에서 직접 풍게나무를 키우며 나비들의 생태를 관찰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자신이 의도한 연구를 마치고 나자 선생은 이 나무를 경기도의 어느 산자락에 다시 심어주었습니다.
자연으로부터 빌린 것을 더 이상 욕심부리지 않고 자연 속으로 되돌려 보낸 것이지요. 그래서 저는 그 산에 갈 때면 사연을 품은 이 나무를 그냥 지나치는 법이 없답니다. 사람들에게 시달리는 바람에 안타깝게도 나무는 몰골이 많이 상했습니다.
흉터투성이인 이 나무의 줄기를 손으로 쓸어보면서, 교통이 불편했던 그 옛날 이 외진 곳까지 나무를 옮겨다 심었던 어느 외로운 노인의 지친 모습을 그려보곤 합니다. 이처럼 아낌없이 제 살을 내어주며 나비들을 키워내는 나무의 수고로움을 곁에서 지켜보자니 어쩌면 이 풍게나무야말로 윤인호 선생이 세상에 남기고 떠난 유일한 묘비명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많은 이들에게 들게 합니다.
글과 사진·김태영(자연생태연구가·<한국의 나무> 공저자) 2014.0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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