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동안이었을까요. 거리의 왕벚나무들이 화사하게 꽃을 피웠습니다. 그리고는 미처 감탄사도 내뱉기 전에 온 세상에 4월의 눈을 흩뿌리고 스러져 버렸습니다. 중국의 시인 등이아(鄧爾雅)는 <벚꽃(櫻花)>이라는 시를 통해 이렇게 노래했답니다.
昨日雪如花, 今日花如雪.
어제는 눈이 꽃과 같더니,
오늘은 꽃이 눈과 같구나.
속절없이 지는 꽃을 눈에 비유할 때 흩날리는 벚꽃만큼 더 잘 어울리는 꽃이 또 어디 있을까요? 그런데 벚꽃을 생각하자니 떠오르는 이야기가 있네요. 바로 일본 에도시대에 살았던 비구니 오오다카키 랭게츠(太田垣蓮月)의 일화입니다.
어느 이른 봄날, 랭게츠는 도보로 순례 여행을 하고 있었답니다. 하루 종일 먼 길을 걸어온 뒤 저물녘이 되어서야 간신히 어느 작은 산골마을에 도착했어요. 그녀는 고단한 몸을 이끌고 하룻밤 쉴 곳을 찾아 집집마다 돌아다녔지만, 야속하게도 마을 사람들은 아무도 그녀를 집에 들이려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실은 그 마을 사람들이 모두 엄격한 계율을 지키는 불교 종파의 신도들이었던지라 설령 비구니라 할지라도 일행이 없는 여자를 집 안에 들일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사방이 캄캄해질 때까지 잘 곳을 구하지 못한 랭게츠는 어둠 속을 더듬어 간신히 마을 어귀에 서 있는 나무 곁에 이르자 더 이상 갈 곳이 없었어요. 그래서 별 수 없이 나무 밑동에 기댄 채로 억지로 새우잠을 청해야 했답니다.
계절이 봄이라곤 하지만 아직 밤 기운이 매우 차가웠던 시기인지라 그녀는 살을 에는 추위 때문에 그만 한밤중에 잠이 깨고 말았어요. 그런데 간신히 눈을 뜬 그녀 앞에는 깜짝 놀랄 만한 정경이 펼쳐져 있었습니다. 밤안개에 싸인 보름달이 주변을 은은하게 비춰준 덕분에 비로소 그녀가 기대고 있던 바로 그 나무가 흐드러지게 꽃을 피운 벚나무임을 알게 된 것이지요. 그것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아름다운 정경이었답니다. 한참 동안 경외감에 사로잡혀 있던 랭게츠는 크게 깨달음을 얻게 됩니다. 이윽고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마을 쪽을 향하여 큰 절을 올리며 이렇게 감사의 기도를 올렸습니다.
“나를 냉대한 그대들의 친절 덕분에,
안개 낀 달밤 아름다운 꽃 그늘 아래
여기 나 자신을 찾았습니다.”
과연 우리네 세상살이가 그렇습니다. 불확실한 시대를 살다 보니 어쩔 수 없이 갖가지 힘들고 고통스러운 장애물과 맞닥뜨리곤 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남들로 인해 겪게 되는 싫고 좋은 일들이 실은 그 어느 것 하나 따로 버릴 것 없이 단단한 인과 관계로 서로 얽히고 설켜 있는 것은 아닐까요? 그래서 지금 당장은 견디기 어려울 정도로 고통스러운 경험이라 할지라도, 시간이 흐르고 나면 그 모든 시련들이 실은 자신을 강하게 키워준 소중한 기회였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되는 날이 올지도 모르겠습니다. 랭게츠라면 그렇다고 말하겠지요. 어느 봄날 밤 아름답게 꽃을 피운 벚나무 아래서 문득 그 사실을 깨우쳤다고 말입니다.
글과 사진·김태영(자연생태연구가·<한국의 나무> 공저자) 2014.0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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