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 창제를 비롯해 자격루·측우기 등 각종 과학기구의 발명을 진두 지휘했던 세종은 학문적 능력으로 보나, 소통과 포용의 리더십을 발휘한 것으로 보나 우리 역사상 최고의 왕으로 꼽힐 만하다. 그런데 무엇보다 세종을 돋보이게 하는 것은 국가의 인재를 최대한 활용하는 시스템을 구축한 점이었다.
집현전(集賢殿)은 최고의 인재를 양성하여 국가의 대계(大計)로 삼으려는 세종의 의지가 적극적으로 구현된 정책기관이었다. 집현전이라는 명칭은 고려 인종 때 처음 사용되었고,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도 정종 때 집현전이 있었으나 거의 유명무실한 기구였다. 세종은 즉위와 함께 집현전을 완전한 국가 기관으로 승격시켜 학문의 중심 기구로 삼았다. 그리고 집현전에 ‘재행연소자(才行年少者)’라 하여 재주와 행실이 뛰어난 젊은 인재들을 모았다. 신숙주, 성삼문, 정인지, 최항 등 세종시대를 대표하는 학자들이 속속 집현전에 모여들었다.
집현전은 1420년(세종 2년)에 설치되어 세조 2년에 없어질 때까지 약 37년간을 존속하였다. 그러나 이처럼 짧은 기간임에도 불구하고 집현전이 우리의 뇌리에 깊이 각인되어 있는 것은 이곳에서 세종 대의 대표적인 학문·문화활동이 완성되었기 때문이다. 집현전에는 세종 대에서 단종 대까지 총 96명의 학자가 거쳐간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조선시대 문과 합격자의 명단을 기록한 <국조방목>의 기록을 보면 집현전 학자 전원이 문과 급제자 출신임을 알 수 있다. 그것도 수석인 장원 급제자가 정인지를 비롯한 16명, 2등이 6명, 3등이 신숙주 등 11명, 4등이 7명 등으로 전체 집현전 학자 중 절반에 가까운 46명이 5등 안에 합격한, 그야말로 국가의 최고 인재들이 발탁되었던 것이다. 이들 우수한 인재들에게 세종이 부여한 임무는 독서와 학문 연구,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한 정책 결정과 국가 주요 간행물의 편찬 사업이었다.
집현전이 위치했던 곳은 현재의 경복궁 수정전(修政殿) 자리로 국왕이 조회와 정사를 보는 근정전이나 사정전과 매우 가까운 곳에 위치해 있었다. 그만큼 집현전에 대한 세종의 관심이 컸음을 의미한다. 세종 스스로도 학문이 뛰어난 군주였지만 홀로 정책을 결정하려고 하지 않았다. 집현전과 같은 기구에서 배출된 학자들의 연구 성과를 충분히 반영하려 했다는 점에서 다수의 의견을 존중한 세종의 면모가 잘 나타나 있다.
집현전에서는 주로 옛 제도들에 대한 해석과 함께 정치 현안의 정책과제들을 연구하였다. 주택에 관한 옛 제도를 조사한다거나 중국 사신이 왔을 때의 접대 방안, 염전법에 관한 연구, 외교문서의 작성, 조선의 약초 조사 등 다양한 연구와 편찬 활동이 이곳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그리고 집현전에 소속된 학자들은 왕을 교육하는 경연관, 왕세자를 교육하는 서연관, 과거시험의 시관(試官), 역사를 기록하는 사관(史官)의 임무도 동시에 부여받았다. 그만큼 이들을 국가의 기둥으로 키운 것이다.
집현전은 세종의 각별한 배려 속에서 수백 종의 연구 보고서와 50여 종의 책을 편찬하였다. <향약집성방>, <삼강행실도>, <자치통감>, <국조오례의>, <역대병요>와 같이 의학, 역사, 의례, 국방 등 전 분야에 걸쳐 많은 책들이 편찬되어 세종시대 문화의 꽃을 활짝 피우게 하였다.
집현전의 설치는 무엇보다 세종이 혼자만의 힘으로 국가의 정책 결정을 하지 않고 다수 인재들에게 학문 연구를 지원하고 그 성과를 국가의 정책으로 활용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그리고 집현전에서 배출된 쟁쟁한 인적 자원은 15세기 찬란한 민족문화를 완성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집현전이라는 국가 인재의 보고(寶庫)를 최대한 활용하면서 ‘함께하는 정치’의 모범을 보였다는 점에서 세종의 리더십을 더욱 돋보이게 하고 있다.
글·신병주(건국대 사학과 교수) 2013.1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