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베 신조 총리가 집권한 이후 일본의 우경화 경향이 극단으로 치달으며 한·일관계도 급속히 냉각되고 있다. 지리적으로 가장 가까운 이웃이면서 늘 우리의 경계 대상이었던 일본. 역사 속에서도 일본에 대해서는 강경 정책과 화친 정책이 병행됐다.
고려 말부터 횡행한 왜구(倭寇)들에 대한 처리 문제는 조선이 건국된 후에도 조정의 큰 고민거리였다. 1419년(세종 1년) 5월 7일 왜구는 충청도 비인현(현재 서천)에 침입하여 정박 중인 조선의 병선(兵船)들을 공격한 다음 내륙으로 상륙했다. 왜구는 상륙 후 읍성을 포위 공격하고 민가를 약탈하는 등 각종 만행을 저질렀다. 인명의 살상뿐만 아니라 성 밖에 있는 민가의 닭과 개를 노략질하여 거의 다 없어지게 만들 지경이었다.
왜구의 공격 보고를 받은 상왕 태종은 왜구의 주력이 대마도를 빠져나간 상황을 역이용하여 적극적인 공격 대책을 수립하였다. 6월 9일 마침내 태종은 왜구의 본거지인 대마도 정벌을 명하였다.
당시 국왕은 세종이었지만, 상왕으로 있던 태종이 국방과 외교를 관장했다. 세종이 내정에 전념할 수 있도록 배려한 것이다. 태종은 “대마도는 본래 우리나라 땅인데 다만 궁벽하게 막혀 있고, 또 좁고 누추하므로 왜놈이 거류하게 두었더니 개같이 도적질하고 쥐같이 훔치는 버릇을 가지고 경인년으로부터 변경에 뛰놀기 시작하여 마음대로 군민을 살해하고, 부형을 잡아가고 그 집에 불을 질러서, 고아와 과부가 바다를 바라보고 우는 일이 해마다 없는 때가 없다. (중략) 신민들이여, 간흉한 무리를 쓸어버리고 생령을 수화(水火)에서 건지고자 하였다”면서 왜적에 대한 강한 분노를 표시하고 전면전을 개시했다. 고려 말부터 노략질하는 왜구에 대해 군사적인 위세를 보여주면서 더 이상 왜구의 도발을 허용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실천한 것이었다.
이종무를 사령관으로 한 조선군은 1419년 6월 19일 오전 10시경 거제도를 출발했다. 6월 20일 낮 12시경 대마도 두지포에 도착한 조선군은 적선 129척을 빼앗고 저항하는 왜구 114명을 사살했다. 21명의 왜구를 사로잡고 가옥 1,939호를 불태웠다. 조선군의 파상적인 공격에 대마도의 왜구들은 대부분 산속으로 피신했다. 대마도의 해안을 장악한 조선군은 산속에 은신한 왜구의 토벌에 나섰다. 3개의 부대 중 제비뽑기를 실시하여 박실이 이끄는 1개 부대를 보냈지만, 지형에 익숙한 적들의 기습 공격을 받고 조선군 180명이 전사하는 큰 피해를 입었다. 조선군은 산속에 은신한 적의 토벌에 어려움을 느끼고, 15일 만에 병력을 모두 철수시켰다. 대마도 정벌에 만족감을 표시한 태종은 세종과 함께 이종무 등 출정하고 돌아온 장수들에게 잔치를 베풀어 주었으며, 200여 명에게는 상으로 관직을 높여주었다. 태종은 대마도 정벌의 의미를 높이 평가하면서 왜구가 조금이라도 도발하면 재정벌에 나설 것을 선언했다. 1419년에 이루어진 대마도 정벌은 왜적들에게 조선의 군사적인 힘이 대단하다는 경험을 확실히 심어줌으로써 조선 침략을 예방하는 효과를 가져왔다. 실제로 대마도 정벌 이후 왜구가 조선의 해안을 대규모로 침략하는 일은 거의 없게 되었다. 1555년 명종 대의 을묘왜변이 일어나고,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기까지 조선 전기 150년간 조선과 일본 사이에는 유례없는 평화가 유지되었다.
글·신병주(건국대 사학과 교수) 2014.0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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