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 1월, 나는 공주사범학교 입시생이었다. 사범학교는 지금은 없어진 학교로 고등학교인데 졸업하면 바로 초등학교 교사가 되는 학교였다. 말하자면 인문학교에 대칭되는 일종의 실업학교 같은 학교였다.
우리 아버지는 당신이 일제침략기 초등학교 교사가 되고 싶었으나 끝내 이루지 못한 소원을 큰 자식인 나를 통해 이뤄보고자 나를 데리고 공주에 와서 나의 입학시험 뒷바라지를 하고 계셨다. 입학시험 절차는 복잡해서 3박 4일 정도를 공주 시내에 하숙집을 정해 지냈다.
입이 짧아 밥을 잘 먹지 않는 나를 위해 꽁치 통조림을 하나 사서 그것을 끼니때마다 나에게만 먹게 했다. 생각해보면 이것은 눈물 나도록 감사한 일이다. 드디어 마지막 시험인 면접을 치르는 시간이 됐다. 내 차례는 늦어져서 창밖에 어둠이 내려앉은 초저녁 무렵.
교장 선생님 앞에 불려나가 일대일 면접시험을 치르고 있었다. 열심히 교장 선생님의 물음에 답하고 있을 때 왼쪽 볼에 미세한 감각이 왔다. 그 긴장된 순간에도 나는 얼핏 고개를 돌려 창밖을 보았다. 아, 거기 유리창에 아버지의 얼굴이 바짝 붙어 있었던 것이 아닌가!
창밖은 그대로 혹한. 아버지는 그때 여름 양복을 입고 계셨다. 그것도 당신의 것이 아니라 막내 삼촌의 것을 빌려 입은 옷이었다. 내복이라도 제대로 입기나 하셨을까?
하지만 나는 그런 아버지가 많이 부끄러웠다. 다른 아이들, 특히 내가 좋아했던 여학생의 아버지는 그 당시 제일 유명했던 ‘골덴텍스’ 겨울 양복을 입고 있었는데 우리 아버지는 여름 양복을, 그것도 삼촌의 것을 빌려 입었다는 사실이 부끄럽기만 했다.
아버지의 소원은 무엇이었을까? 당장 춥지 않고 배고프지 않은 것이 소원이었을 것이다. 그렇다. 우리 아버지의 일생은 춥지 않기 위해서, 배고프지 않기 위해서 노력하며 사신 일생이었다. 그에 비하여 나의 일생은 부끄럽지 않기 위해 산 날들이라 할 것이다.
실상 춥지 않고 배고프지 않기와 부끄럽지 않기는 서로 다른 것 같지만 뿌리가 하나라고 볼 수 있겠다. 오히려 춥지 않고 배고프지 않기가 더 근본적인 삶의 뿌리라 할 수도 있다. 한사코 춥지 않고 배고프지 않기를 소망하며 살았던 아버지가 있었으므로 이나마 부끄럽지 않게 살 수 있었던 아들의 세대가 가능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자식의 세대는 아버지의 세대에 오히려 많은 빚을 지고 있는 셈이요, 오래도록 고맙게 여겨야 할 일이다. 정말로 그건 그렇다. 그러한 아버지 세대가 있었으므로 자식의 세대도 있는 것이다. 여기서 다시금 나는 한 말씀을 떠올려 본다. ‘등컬(줄기를 잘라 낸 나무의 밑동) 없는 나무가 어디 있느냐!’ 생전에 할머니가 자주 하던 말씀이다.
나태주 시인_ 풀꽃 시인. 전 한국시인협회장. 100여 권의 문학 서적을 발간했으며 충남 공주에서 풀꽃문학관을 운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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