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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에서 승승장구하고 사람들 사이에서 평판도 좋은데 정신건강의학과는 왜 온 거지?’라는 생각이 들게 하는 이들을 종종 본다. 새벽에 일어나 자기계발을 한 뒤에 출근해서 늦게까지 최선을 다해 일하고 운동까지 마쳐야 하루 일과가 끝난다. 추진력 있고 마감시간을 딱딱 맞추며 일처리도 완벽하다. 게다가 성격은 왜 이렇게 좋은 거야. 항상 웃고 또 웃으며 긍정 에너지가 넘친다. 남들이 모두 “대단하다”고 칭찬한다.
병원에 온 나름의 이유가 상담을 하면서 차차 드러나긴 하지만 어쨌든 첫인상만 보면 치료하려는 나보다 세상살이에는 더 도가 터 보였다. 그런데 이렇게 말하는 게 아닌가.
“짬이 생기면 어쩔 줄을 모르겠어요.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과도 약속을 잡고 딱히 살 게 없어도 마트에 가서 장을 봐요.”
일 없는 휴일에는 공허하고 말로 표현하기 힘든 불쾌감이 들어서 바쁘게 일할 때가 마음은 오히려 편하다고 했다. “무슨 걱정이 있냐?”라고 물으면 “특별한 문제는 없다”고 답하는데도 자신을 가만히 내버려두지 못 했다. 한시도 쉬지 않고 뭐라도 해야 직성이 풀리고 편히 쉬면 잘못을 저지른 것마냥 초조해했다.
이 하소연을 따라가다 보면 결국 심심함에 대한 두려움, 편해지는 것에 대한 죄의식을 갖고 있다는 걸 알게 된다. “한가하게 있는 건 나쁜 거야. 바빠야 거친 세상에서 살아남아”라는 생각이 심심해질 때마다 머릿속에서 불쑥 치밀어 올랐던 거다. 심심함을 견디지 못하는 사람의 내면에는 “자신이 쓸모없어지는 것에 대한 공포”가 똬리를 틀고 있다.
회사나 타인이 자기 가치를 인정해주면 잠시 안도하지만 얼마 못 가 다시 불안해지고 불안을 잠재우기 위해 자기를 더 쥐어짰다. 불안을 동력 삼아 완벽을 향해 자기 영혼을 채찍질했던 것이다. 이런 ‘고기능성 불안(High Functioning Anxiety)’에 시달리는 이들은 한가해지는 걸 못 견딘다. 세상이 자신에게 요구하는 것을 따르는 데만 익숙해서 여유가 생겨도 스스로를 신나게 만들 줄 모른다.
“모든 인류의 문제는 인간이 혼자 방에 조용히 앉아 있지 못 한데서 비롯된다”고 말했던 프랑스의 수학자이자 철학자 블레즈 파스칼은 이미 300년도 훨씬 전에 21세기에 심심하게 자기를 내버려 두지 못 하는 사람이 늘 것이란 사실을 미리 알고 있었던 예언자였는지도 모르겠다.
심심함은 “오롯이 나의 영혼이 기뻐할 일을 하라!”고 마음이 보내는 메시지다. 일과 상관없이 영혼을 살찌울 수 있는 활동이라면 뭐든 좋다. 참신한 아이디어가 번뜩이는 것이면 더 좋다. 흥얼거리며 따라 부르게 되는 곡 하나를 반복해서 들으며 골목길을 걸어 보거나 휴대전화로 밤하늘에 별자리를 찾아봐도 좋다. 책장에 꽂힌 책들 중에서 나만의 베스트셀러를 꼽아 보거나 첫사랑의 기억으로 소설 쓰는 작가가 돼 이야기를 구상해보자. 살고 싶은 집의 평면도를 그리고 나중에 하고 싶은 가게 이름을 미리 짓고 로고도 직접 디자인해보자.
심심하다고 누리소통망(SNS)과 인터넷 뉴스를 따라다니다 보면 나중에 더 불안해질 테니 이건 금물이다. 그리고 인간이 진정으로 의미 있게 살기 위해선 간간히 게으름을 피워야 한다는 사실도 잊지 말자.
김병수 의사_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이자 몇 권의 책을 쓴 저자.
서울아산병원에서 근무했고 지금은 교대역 작은 의원에서 사람들의 상처 난 마음을 잇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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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K-공감누리집(gonggam.korea.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