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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수학능력시험만 끝나면 혼자 제주도 가서 한 달 살기 하려고요!” 대입 수험생 자녀를 둔 중년 여성 A는 상담이 끝날 무렵 항상 이렇게 말했다. 집밥 먹는 게 최고의 행복이라는 남편을 위해 20년이 넘는 결혼 생활 동안 아침과 저녁상을 꼬박꼬박 챙겼다. 3년 전에 첫째 아들, 이번에 둘째 아들이 고등학교 3학년이다. 올해 수능이 끝나면 남편과 두 아들을 내버려두고 제주도에 가서 한 달이고 두 달이고 혼자 지내겠다고 했다. 막연한 희망이 아니라 반드시 그렇게 할 거라고 머리숱이 줄어버린 갈색 머리카락을 손으로 빗어 넘기며 몇 번씩 힘줘 말했다.
갱년기 우울증으로 꼼짝하기 싫은데도 우울증 약을 먹으면 그래도 기운이 나서 수험생 아들의 매니저 역할을 해낼 수 있다며 웃었는데 그럴 때마다 눈가 주름도 깊어졌다. “수능만 끝나면 홀가분해질 거예요. 게다가 제주도로 떠나면 그게 우울증 완치법 아니겠어요!”라고 했다. 그의 이런 소망을 들을 때마다 나는 “지금 말한 결심, 나중에 흐트러지면 안 됩니다”라며 다짐을 받듯 대꾸했다.
상담하면서 자주 듣는 말이 뭐냐면 “~만 해결되면 ~를 할 텐데”라는 것이다. 예를 들면 이런 거다 “아들 대학 보내놓고 나면 그때부터 인생을 즐길 거예요.” “딸이 시집가서 독립하면 피아노를 배울 거예요.” “지금은 젖먹이 손자 돌봐줘서 못하지만 어린이집에만 들어가고 나면 그 후부터 여행 다니면서 자유롭게 살 거예요.” 하지만 애석하게도 자신을 짓누르던 스트레스가 해결돼도 계획을 실행했던 이가 그리 많지 않았다.
시간이 흘러 자녀는 대학생이 됐고 사위를 보고 손자는 할머니 없이도 어린이집에서 사귄 또래랑 놀게 됐을 때 나는 그들에게 물었다. “이제는 재밌게 지내고 있는 거죠?” 아들이 대학만 가면 자연히 행복해질 것 같다던 중년 여성은 “하루 종일 아들이 자기 방에 틀어박혀 나오질 않아요. 뭐 하냐고 물으면 이제는 자기가 알아서 한다며 버럭 화를 내요. 아들 걱정에 잠이 안 와요”라며 얼굴을 찌푸렸다.
피아노를 배우겠다고 했던 분은 “울면서 딸이 전화했는데 내 속이 뭉그러져요. 사위하고 돈 문제로 싸웠나봐요. 내가 어떻게 해줘야 할지”라며 말끝을 흐렸다. 혼자서 여행 다닐 거라고 했던 분은 “허리 디스크가 심해졌어요. 이 병원, 저 병원에서 치료받다 보면 일주일이 금방 가버려요”라고 말했다.
지금 삶에서 해결되지 않은 문제가 있으니 자신의 소망 실현은 미뤄둬야 한다는 이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곤 한다.
“챙 넓은 검정 모자를 쓴 마법사가 당신이 곤히 잠든 밤에 몰래 찾아와서 당신의 머릿속을 들여다보고는 ‘열심히 살고 있는데 마음고생은 이만저만이 아니군. 이왕 온 김에 스트레스를 몽땅 해결해주고 가야겠어’라며 요술봉을 흔들었어요. 다음 날 아침에 깨어보니 기적처럼 모든 문제가 사라졌어요. 자, 그렇다면 당신은 어떻게 살고 있을까요? 그렇게 살면 어떤 느낌일까요? 그런 자기 모습을 간절히 원한다면 ‘나중에’라고 하며 미루지 말고 지금 바로 시작하세요.”
이제 수능도 끝났으니 진료실 문을 열고 들어올 A가 어떻게 말하고 행동할지 궁금하다. 그의 결심이 단단했으니 이전에 내가 봤던 이들과는 분명 다를 것이다. 그렇게 믿어 의심치 않는다.
김병수 의사_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이자 몇 권의 책을 쓴 저자.
서울아산병원에서 근무했고 지금은 교대역 작은 의원에서 사람들의 상처 난 마음을 잇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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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K-공감누리집(gonggam.korea.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