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자격증을 따고 군의관으로 입대했다. 훈련을 마치고 처음 발령 받은 근무지는 경북 경산에 있는 국군병원이었다. 그곳에서 일한지 몇 달 지나지 않아 이라크 파병 통지서를 받았다. 레지던트 생활을 마치고 전문의가 된 직후에 매서운 날씨를 이겨내며 3개월의 훈련을 마치고 그제야 안정된 생활을 하나 싶었던 시기였다.
그 당시 아내는 임신중이었다. 저 먼 중동 땅에서 근무하라는 명령장을 받고 나서 아내와 부둥켜안고 울었다. 2004년 봄 나는 이라크에서 딸이 태어났다는 소식을 수화기로 전해 들었다.
만약 내가 “인생은 즐겁고 행복한 것이라야 한다”는 믿음에 매달려 사는 사람이었다면 2004년을 견디기가 더 어려웠을 것이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나는 약간의 비관주의를 품고 있는데다가 “살면서 겪는 모든 일에는 나름의 신비가 숨겨져 있는데 우리 인간은 시간이 한참 지난 후에야 그걸 발견할 수 있어!”라고 믿었기에 그나마 견디기가 수월했다.
예상치 못 한 시련이 찾아와 삶을 원망하고 싶은 마음이 불쑥 치밀어 오를 때마다 ‘진주를 품은 조개 하나를 건네받은 거야’라고 생각하려고 애쓰며 산다. 2004년에 겪었던 일들을 지금은 내 책의 소재로 쓰기도 하고 강연할 때 유머 삼아 꺼내 놓기도 한다.
그 해에 겪었던 수많은 일 중에 C-130, 일명 허큘리스라고 불리는 공군 수송기를 탔던 경험은 지금까지 뇌리에 강렬하게 남아있다. 이라크 어느 공항에서 쿠웨이트의 알리 알 살렘 공군 기지까지 이걸 타고 날아갔다. 비행하는 내내 밖이 보이지 않는 좁은 통로에 빨간색 로프로 만든 의자에 앉아 있었다. 비행기는 이륙하자마자 고도를 급하게 올리더니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왜 이렇게 조정하는 거냐고 물었더니 그래야 로켓포를 피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어차피 벗어날 수 없는 상황에서 ‘왜 내가 이런 일을 겪어야 하는 거야!’라고 억울해봤자 몸도 마음도 더 괴로워질 뿐이다. 어지럽고 토할 것 같았지만 ‘아무나 탈 수 없는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롤러코스터를 타고 있는 거야’라고 스스로에게 최면을 걸었다. 지금은 그때 체험을 블로그에 무용담처럼 늘어놓고 있다.
살다보면 몸이 부서져라 애써도 그에 마땅한 보상을 얻지 못 하는 상황을 누구나 겪게 된다. 빈둥거리며 살다가도 행운이 넝쿨째 굴러 들어오는 일도 가끔 생긴다. 이런 부조리에 맞닥뜨렸을 때 “당신에게 삶이란 무엇과 같습니까?”라고 질문하고 대답을 들어 보면 그 사람의 인생 태도가 드러난다.
삶을 게임처럼 생각하는 사람에게 세상은 경쟁의 무대이고 그 위에서 이기는 것을 목표로 행동할 것이다. 인생이 신의 선물이라 믿는 이라면 그와는 다르게 살 것이다. “세상살이는 무서운 거야”라는 생각을 품고 산다면 미지와 조우했을 때 겁먹고 도망치려고 할 것이다. 인생을 “한 번도 타 본 적 없는 놀이기구로 가득한 공원이야!”라고 여기면 역경에 맞서기가 그나마 낫다. 그리고 인생을 한 편의 비극이라 믿더라도 우리가 보일 수 있는 최선의 자세는 하루하루를 용감하게 살아내는 것일 테다.
김병수 의사_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이자 몇 권의 책을 쓴 저자. 서울아산병원에서 근무했고 지금은 교대역 작은 의원에서 사람들의 상처 난 마음을 잇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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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K-공감누리집(gonggam.korea.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