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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울증과 가족 문제로 시달려온 40대 여성이 오늘 첫 환자였다. 성가시게 오르내리는 기분과 씨름하면서도 책임감과 성실함으로 지금껏 일을 놓아본 적이 없었는데 서너 달 전에야 비로소 “이제 좀 쉬려고요. 친정과도 당분간 거리를 두고 내 마음을 돌보고 싶어요”라고 말했다. 그때부터 좋아하던 책읽기와 아이들을 위해 요리하며 하루를 보내는 것만으로도 너무 행복하다고 했던 그였다. 상담실 의자에 앉아 굳은 표정으로 “유방암이래요. 며칠 있다 수술 받을 거예요”라고 했을 때 눈물이 그의 눈가에 맺혔다가 이내 사라졌다.
그리고 바로 이어서 상담한 환자는 오 년 전에 유방암 수술을 받고 지금까지 재발 없이 지내고 있다. 삼 년 전쯤 그를 처음 봤을 때는 “암이 재발할까 봐 불안해요. 내가 죽고 나면 아들은 어떻게 될까요?”라는 말만 되풀이하며 공포에 떨었다. 어떤 말로도 그를 진정시킬 수 없었다. 요즘은 불안이 많이 가시고 건강에 자신이 생겼는지 간간히 술을 즐긴다. “술 마시면 안돼요. 불안증이 재발해요. 무엇보다 몸 건강을 위해서 금주하셔야죠”라고 야단치듯 말했더니 그는 진료실 밖으로 새나갈 정도의 목소리로 “알겠어요. 술 안 마실 테니 걱정 마세요”라고 대꾸했다.
24시간 영업하는 식당을 운영 중인 사장님은 공황장애 환자다. 야간 영업이 매출의 큰 부분을 차지했는데 코로나19로 직격탄을 맞았다. 2021년 초까지만 해도 “사업하다 보면 적자 나기도 하고 대출도 받는 거죠. 늘 있는 일인데요, 뭘”이라며 웃었다. 요즘은 검정색 마스크 위의 눈가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공황 발작이 잦아졌고 아내와 종종 다퉜다. 얄궂게도 다음에 들어온 다른 사장님은 비대면 시대에 발맞춰 라이브 커머스(실시간 판매전) 사업을 시작할 거라며 흥이 잔뜩 올랐다. 공황장애 때문에 외출할 때마다 불안했는데 목표가 생기니 지방 출장도 가고 회의하며 낯선 사람들을 만나도 끄떡없이 지낸다.
대학 졸업하고 하는 일 없이 몇 년째 부모와 같이 사는 20대 청년은 오늘 상담에서도 “하고 싶은 게 없어요”라며 들릴 듯 말 듯 웅얼거리다 돌아갔다. 같이 온 어머니는 “우리 애가 좋다고만 하면 뭐든지 도와주고 싶은데 아무 것도 하기 싫다고 하니 답답해 죽을 지경이에요”라며 탄식을 내뱉었다.
이름을 들으면 누구나 알 법한 배우가 오늘 마지막 환자다. 불면증 때문에 예약 없이 찾아왔다. 늦은 저녁의 고즈넉한 공기에 취해서인지 그는 이런 저런 넋두리를 풀어놨다. “어릴 때부터 하고 싶은 게 너무 많았어요. 무서운 아버지와 우울한 어머니는 나를 이끌어줄 수 없었죠. 조금만 더 사랑 받고 자랐더라면…”이라고 말할 땐 목소리가 조그맣게 줄어들었다.
밤 9시가 훌쩍 넘었다. 혼자 진료실 책상에 앉아 있다. 이곳에서 2021년 한 해가 저물어가는 어느 날 나는 그들과 함께 시간을 나눴다. 누구는 암에 걸렸고 누구는 암에서 벗어났으며 누구는 빚내서 한 달을 넘기고 또 넘기고 있는데 다른 누구는 새로운 사업에 돈을 쏟아 부었다. 누군가는 세상에 알려지기 위해 혼신을 다하는데 또 다른 누군가는 자기가 만든 고치 안에서 나오지 않으려 했다.
그날 밤 창밖에선 비만클리닉 빌딩 벽에 붙어 있는 요란한 네온사인이 희번덕거렸고 내 안에서는 ‘삶이란 도대체 뭘까?’라는 물음이 점멸하며 마음을 어지럽히고 있었다.
김병수 의사_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이자 몇 권의 책을 쓴 저자.
서울아산병원에서 근무했고 지금은 교대역 작은 의원에서 사람들의 상처 난 마음을 잇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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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K-공감누리집(gonggam.korea.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