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티이미지뱅크
마지막 환자를 진료하고 병원 문을 잠그고 나오는 시간은 오후 8시 무렵이다. 조금 더 빨리 끝내고 싶지만 퇴근하고 상담을 오는 직장인들이 있어서 그리 못 하고 있다. 해가 일찍 떨어지는 늦가을쯤부터는 일을 마칠 무렵의 내 기분도 덩달아 어두워지는 느낌이 든다. 그 상태로 집으로 바로 들어가면 아무것도 하기 싫어서 소파에 드러누워 있게 되는데 귀한 저녁 시간을 이렇게 흘려보내면 마음이 밝아지지 않는다.
그래서 일터와 집 사이에서 스트레스를 날려버릴 중간 지대가 필요했다. 바로 헬스장이다. 대단한 운동을 하지는 않는다. 그저 걷고 뛴다. 몸을 많이 움직일수록 낮 동안 쌓였던 긴장이 잘 풀린다. 밤에 푹 잘 수 있고 다음 날 컨디션도 더 좋아진다.
지친 몸을 억지로 움직이게 하는 건 하루하루를 견뎌내기 위한 일종의 수련 같은 것이라 사실 그리 재밌지는 않다. 그래도 꾸준히 할 수 있었던 이유는 열심히 뛰고 난 뒤에 하는 목욕이 좋아서다. 뜨뜻한 물이 가득한 탕 안에 들어가 눈을 감고 있으면 천국이 따로 없다. 이 느낌을 너무 사랑하기 때문에 고된 운동도 참고 할 수 있었다.
나만의 우울 해소법도 뜨거운 탕에 들어가 몸을 데우는 거다. 그러면 의욕이 슬금슬금 올라오고 활기가 되살아난다. 계절에 따라 컨디션이 변하는 체질인데 겨울이면 아침에 침대에서 나오기가 어려워지고 기상 시간도 늦어지기 일쑤다. 이럴 때도 일어나자마자 뜨거운 물이 머리 위에서 폭포수처럼 떨어지게 샤워를 하면 정신에도 온기가 돈다.
미국 위스콘신대학교 연구 팀은 우울증 환자의 심부 체온이 정상보다 1.5℃ 올라갈 때까지 열기가 나오는 통 안에 있도록 하는 치료를 정기적으로 시행했더니 일주일 후에는 항우울제를 먹은 것과 비슷한 수준으로 우울 증상이 좋아졌다는 결과를 발표한 적이 있다. 핀란드 연구 팀은 773명의 일반인을 대상으로 정서를 자극하는 영화를 보여준 후에 체온 변화를 측정했는데 행복감을 느낀 이들은 몸 전체에서 온도가 고르게 올라갔고 우울감에 젖은 사람들은 전신 체온이 낮아지는 것을 발견했다. 한 해가 끝나갈 무렵, 연인을 찾지 못한 청년이 “옆구리가 시리다”고 말하는 것처럼 감정에 따라 체온을 다르게 느낄 수 있음을 확인한 것이다.
우리는 의지만으로 정서를 조절할 수 없다. ‘좋은 기분을 느낄 거야!’라고 다짐한다고 그렇게 되지 않는다. 하지만 몸이 따뜻해지면 자연스레 마음의 온도도 올라간다. 그래서 나는 우울증 환자에게 “뜨거운 물로 목욕을 자주 하세요”라고 권유하기도 한다. 정신건강의학과 치료도 어쩌면 온도를 조절하는 것과 비슷할지 모른다. 차갑게 식어버린 감정 때문에 괴로워하는 이가 세상의 온기를 빨아들여 마음의 온도를 올릴 수 있게 도와주는 것이 정신건강의학과 의사의 일이니 말이다.
종아리가 뻐근해질 정도로 뛰고 난 뒤에 하던 반신욕도 요즘 몇 달 동안 하지 못했다. 늦은 저녁 러닝 머신 위를 뛰던 저녁 습관이 속보로 바뀌었고 운동 후 땀에 젖은 몸도 제대로 씻지 못했다. 고된 일과를 보낸 후 식어버린 마음을 훈훈하게 만들어줬던 뜨뜻한 목욕물이 너무나 그립다. 이 글이 <공감>에 실려 나올 때쯤에는 나의 저녁 습관이 이전처럼 제대로 돌아가기를 고대한다.
김병수 의사_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이자 몇 권의 책을 쓴 저자.
서울아산병원에서 근무했고 지금은 교대역 작은 의원에서 사람들의 상처 난 마음을 잇고 있다.
K-공감누리집의 콘텐츠 자료는 「공공누리 제4유형 : 출처표시 + 상업적 이용금지 + 변경금지」의 조건에 따라 자유롭게 이용이 가능합니다.
다만, 사진의 경우 제3자에게 저작권이 있으므로 사용할 수 없습니다.
콘텐츠 이용 시에는 출처를 반드시 표기해야 하며, 위반 시 저작권법 제37조 및 제138조에 따라 처벌될 수 있습니다.
[출처] K-공감누리집(gonggam.korea.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