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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료실 책상을 마주 하고 앉아 한참 동안 이야기를 들었는데 ‘도대체 이분이 정신건강의학과에 온 이유가 뭘까?’ 하고 의아해졌다. 오래 듣고 난 뒤에 이렇게 질문하는 게 죄송했지만 “제가 어떻게 도와 드리면 좋을까요?”라고 물었다. ‘그걸 왜 의사가 상담받으러 온 나에게 묻나?’라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상담자는 이렇게 대답했다. “저를 괴롭게 만드는 그 사람이 어떤 성격인지 알고 싶어서 왔어요!”
정신건강의학과 의사의 일이란 눈앞에 있는 환자가 곤경에서 조금이나마 벗어날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것이지 본 적도 없는 사람을 제삼자의 이야기만 듣고 판단할 수는 없다. 그런데 비슷한 상황을 종종 접한다. 하루가 멀다 하고 부부 싸움 중인 아내가 “우리 남편은 성격이 이상한 것 같아요”라고 하는 말도 자주 듣고 자신을 괴롭히는 직장 상사가 사이코패스인지 확인하고 싶어서 전문가 의견을 들으러 왔다는 사람도 만난다. 그러다 보니 ‘정신건강의학과 의사도 역학인처럼 사주를 알거나 그 사람이 쓰던 물건으로 운명을 알려 줄 수 있어야 하나?’ 하고 엉뚱한 상상을 한 적도 있다.
갈등하고 반목하는 상대의 성격이 궁금한 건 자연스러운 심리다. 그 사람의 성향을 잘 알면 설득하거나 싸워서 이길 수 있다고 여기니까 자신과 갈등상태에 있는 대상의 성격을 파악하고 싶은 게 당연하다. 성격 검사가 유행한 이유도 자기뿐만 아니라 자신이 미워하는 타인의 성격을 분석하고 싶은 동기도 한몫했을 테다. 그런데 이런 심리에는 늘 함정이 도사리고 있다.
자기 잘못을 설명할 때는 상황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고 하고 타인의 실책은 성격 탓이라고 믿는 심리적 편향에서 우리는 자유로울 수 없다. 새로운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는 부하 직원에게 직장 상사가 “융통성 없고 고집이 센 그 성격 좀 고쳐”라고 핀잔하거나 매사에 자식 걱정하는 아내를 두고 남편은 “당신은 예민한 성격이 문제야”라고 한다. 그런데 부하 직원의 말을 들어보면 “아버지가 편찮으셔서 마음에 여유가 없어요”라고 말하고 아내는 “요즘 우리 딸이 남자 친구와 헤어지고 우울해해서 걱정이다. 남편 성격이 원래 무심하고 정이 없다”고 한다. 모두 ‘행위자-관찰자 귀인 편향’이라는 심리적 덫에 걸려 있는 것이다. 같은 행동이라도 당사자는 상황을 원인으로 꼽고 관찰자는 행위자의 내면에서 원인을 찾는 심리 경향을 일컫는다.
심리 전문가도 종종 이런 함정에 빠진다. 어떤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님은 입버릇처럼 “그 사람은 성격이 어떠하기 때문에 이런저런 문제가 생기고…”라고 자주 말했는데 그분 주위에서는 갈등이 끊이지 않았다. 성격을 정확히 분석할 줄 알아도 현실에서 일어나는 갈등의 원인을 성격에서만 찾으면 풀기 어렵다. 성격 때문이라고 여기면 변하지 않을 거라 예상하고 상대가 근본적으로 문제가 있다고 느끼니 좋은 감정이 생길 리 없다.
“그 사람 성격이 원래 그렇잖아”라고 말하지 말고 ‘합리적이고 이성적이며 품위 있는 그 사람이 도대체 무엇 때문에 그렇게 행동했을까?’라고 상상력을 발휘해보자. 아울러 ‘상대를 기분 나쁘게 만든 내 행동은 무엇일까?’라고 자신을 관찰해보면 좋겠다.
갈등은 나쁜 것이 아니다. 적당한 갈등 속에서 사는 법을 익히는 것이 인생 교육의 요체다. 우리 마음은 갈등을 겪어야 성장한다. 삶의 지혜는 갈등에서 얻는 보물이다. 성격 때문에 갈등이 생기는 게 아니고 성격은 갈등 덕분에 계발된다.
김병수 의사_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이자 몇 권의 책을 쓴 저자. 서울아산병원에서 근무했고 지금은 교대역 작은 의원에서 사람들의 상처 난 마음을 잇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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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K-공감누리집(gonggam.korea.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