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하면 생각의 초점이 자신에게 모아진다. 자기 마음에만 집중하는 것은 우울증 환자의 특징적인 사고 습관이기도 하다. ‘우울증 때문에 앞으로 나는 아무 일도 못 할 거야!’라고 속으로 곱씹고 ‘난 정말 우울해, 이 세상 누구보다 내가 제일 힘들어!’라며 감정에만 파고드는 것이다. ‘나는 왜 우울증에 걸렸나?’ 하고 자기 안에서 원인을 필사적으로 찾으려는 이들은 그 기분에서 빠져나오지 못한다. 나에게 집착할수록 우울감은 더 커진다.
우울할수록 ‘나’라는 인칭대명사를 더 자주 쓴다. 오랫동안 상담하면서 우울증 환자의 언어 습관을 관찰해보니 그랬다. 마음이 아프니까 나를 주어로 말을 많이 할 수밖에 없고 그러니 이런 현상이 관찰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부정적 감정을 표현하는 단어보다 “내가… 나는… 나를”이라는 일인칭 단수 대명사의 사용 빈도가 우울증을 더 정확히 예측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임상 연구를 통해서도 확인됐다. 우울의 심도가 깊을수록 그 사람의 말이나 글에서 나라는 표현이 많이 발견된다고 한다.
참고로 분노에 찬 사람은 ‘나’보다 ‘너’ ‘당신’ 같은 이인칭이나 ‘그녀’ 또는 ‘그(들)’처럼 삼인칭 대명사를 더 많이 쓴다. 화가 나면 자신을 들여다보지 않고 자기를 열 받게 한 대상에게 생각의 초점이 맞춰지기 때문이다. 의지와 상관없이 사고가 흐르는 방향을 감정이 꺾어놓는 것이다.
병이 났거나 통증이 심해져도 나를 더 사용한다. 신경이 온통 자신에게 모아지기 때문이다. 비록 연구 대상자 수가 적지만 자살한 시인 아홉 명과 그렇지 않은 아홉 명의 시를 분석한 결과를 봤더니 부정적 감정 단어는 두 그룹에서 차이가 없었지만 ‘나’라는 표현은 자살한 시인들의 작품에서 훨씬 흔하게 나타났다고 한다.
나빴던 기억을 떠올리면서 글을 쓰라고 하면 좋은 추억을 회상할 때보다 나라는 단어를 자기도 모르게 더 자주 사용한다. ‘내가 도대체 왜 그렇게 했을까? 지금 힘든 건 내가 그때 잘못된 선택을 했기 때문이야!’라며 과거를 되새김질하는 생각 습관을 반추라고 한다. 실수에서 교훈을 얻고 해결책을 찾는 건 반성이다. 지나간 잘못만 곱씹으면 반추다. 반추는 하면 할수록 우울해진다. 우리는 종종 반추를 반성이라 착각한다.
우울증에서 벗어나면 일인칭 단수 대명사를 덜 쓴다. 관심의 범위가 가족과 친구, 주변의 사물과 공간, 그리고 호기심이 생기는 미지의 대상으로 확대되기 때문이다. 일에 몰두해도 그렇다. 눈앞의 과제에 집중하느라 나에게 덜 신경 쓴다. 마음을 괴롭히던 문제에만 집착했던 환자가 치료가 잘돼 회복하면 “지금까지 고민했던 내 안의 문제들이 이제는 남의 일처럼 느껴져요”라고 말한다. 이런 말을 자주 듣다 보니 나에게서 벗어날 수 있는 능력을 키우는 것이 우울증 치료의 중요한 목표라는 걸 깨달았다.
생각이 온통 나에게 쏠린다면 ‘아, 내 감정 상태가 우울하구나!’ 하고 알아차리고 ‘지금 이 순간 내게 진짜 중요한 일은 뭐지?’라고 관점을 옮겨보자. 글쓰기 숙제를 해결하고 말만 하고 실천하지 않았던 운동을 하고 시험 공부를 다시 시작하는 행위를 통해 나에게 모아졌던 생각이 다른 곳으로 흩어지면 우울한 기분도 서서히 걷힐 것이다.
김병수 의사_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이자 몇 권의 책을 쓴 저자.
서울아산병원에서 근무했고 지금은 교대역 작은 의원에서 사람들의 상처 난 마음을 잇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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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K-공감누리집(gonggam.korea.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