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라이튼에 고객들이 보내온 무선청소기, 공기청정기 등 가전제품들이 수리를 기다리고 있다.
탄소중립 선도 새활용 업체 ‘인라이튼’
쉽게 사고 쉽게 버리는 시대다. 전자제품 역시 마찬가지다. 국제연합(UN)이 펴낸 ‘글로벌 전자폐기물 모니터 2020’ 보고서에 따르면 2019년 전 세계에서 배출한 전자폐기물은 무려 5360만 톤에 이른다. 대형 유람선 350?대 무게와 맞먹는다. 재활용하지 못한 전자폐기물은 이산화탄소를 발생시키고 이는 지구온난화를 부추긴다.
전자폐기물로 생기는 지구환경 문제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테지만 막상 전자제품이 고장 났을 때 우리 머릿속엔 생각이 많아진다. ‘해외 직구로 산 건데 어디서 고치지?’ ‘서비스센터는 수리비가 비쌀 텐데’ ‘사설업체 찾기도 힘들잖아. 어차피 또 금방 고장날 텐데’ 고민 끝에 내리는 결론은 대개 비슷하다. ‘그냥 버리고 새로 사자!’
그런데 사회적 벤처기업 인라이튼이 운영하는 누리집 배터리뉴(better-renew.co.kr)에 접속하면 다른 결론에 이를 가능성이 크다. 에너지와 환경문제에 관심을 두고 전자제품 수리 서비스를 제공하는 이 기업은 사람들에게 전자제품을 합리적인 비용으로 고쳐서 다시 쓸 것을 믿음직스럽게 제안한다.
누리집 접속 뒤 제품 모델명 등 몇 가지 정보만 입력하면 서비스 이용료를 확인하고 수리 신청을 할 수 있는 간단한 시스템이다. 이 기업은 저탄소·친환경·자원절약 등 녹색성장 전략에 일자리 창출을 뜻하는 한국판 뉴딜 정책이 더해진 그린 뉴딜을 선제적으로 실천하는 의미 있는 사례다.

▶인라이튼 신기용 대표가 진공청소기 원리를 이용해 벌을 죽이지 않고 이동시키는 벌집 제거기
를 설명하고 있다.
친환경 전자제품 수리로 그린 뉴딜 실천
인라이튼은 울산?과학기술원 대학원 디자인 및 인간공학부에서 ‘사회 혁신을 위한 디자인’을 연구한 신기용 대표가 2014년 설립한 기업이다. 각종 사회 이슈를 디자인으로 풀어보려는 고민을 했던 신 대표의 관심은 어느새 전 세계 에너지 불균형 문제까지 닿았다.
이는 아프리카에 보낼 태양광 램프용 배터리 개발로 이어졌다. 이후 2013년 소셜 벤처 경연대회에서 ‘병렬연결식 모듈형 태양광램프’로 최우수상을 받은 것을 계기로 창업을 향한 관심이 생겼다. 논문으로 주로 접한 사회문제를 하나씩 해결해나가는 여러 조직을 만나며 신 대표 역시 사회 변화를 일으키는 사업 모델에 매력을 느꼈다. 인라이튼은 그렇게 닻을 올렸다.
“태양광 램프용 배터리 개발이 계기가 됐습니다. ‘세상을 밝히다’라는 뜻의 ‘인라이튼’이라고 이름 붙였어요. 배터리뉴는 ‘더 나은 되살림’을 뜻합니다. 이미 밝은 곳을 더 밝게 만드는 것보다 사회 어두운 곳을 밝혀 온 세상을 고루 더 밝게 만들자는 의미죠.” 인라이튼이 자리한 서울 성동구 서울새활용플라자에서 만난 신 대표는 회사와 누리집 이름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창업 초기 신 대표는 배터리 문제에 주목했다. 지금은 대부분 일체형이지만 당시만 해도 분리형 스마트폰 배터리가 주로 쓰였다. 버려지는 배터리를 새 활용(업사이클)한 제품을 만들었다. 그러다 전자제품을 고쳐 써 전자폐기물 배출 최소화를 돕는 지금의 사업 모델을 구상했다.
무선청소기, 공기청정기, 가습기…. 인라이튼 공간에 들어서자 일상에서 많이 쓰는 가전제품이 많이 보였다. 주문·접수되는 제품 가운데에는 애프터서비스(AS)가 보장되지 않는 해외직구 제품이 많은 편이다.
한쪽엔 ‘안심 배송박스’로 불리는 검은색 상자들이 쌓여 있었다. 서비스 신청 완료 뒤 고객에게 이 상자를 보내면 고객이 제품을 넣어 인라이튼 측에 다시 보내는 방식이다. 상자는 재사용하도록 만들었다. 포장 완충재도 생분해성 필름 등을 사용했다. 환경을 향한 고민이 느껴지는 대목이다. 수리 과정에서 나온 폐기물도 수거 업체를 통해 재활용한다.
▶인라이튼의 작업실 벽 이곳 저곳에는 왜 전자제품을 고쳐서 써야 하는지 알리는 문구가 적혀 있다.
기술 장인과 청년들 함께하며 기술 전수
인라이튼의 수리 비용은 합리적이다. 예를 들어 모터 속 회로 소자가 한 개 고장 났다면 모터를 통째로 교체하는 식으로 수리할 수도 있지만 이곳에선 문제가 되는 최소한의 필요 부품만 교체해 비용을 산정한다. 소비자는 비용과 버리는 물건도 최소화할 수 있다. 돈도 절약하고 환경에도 도움을 주는 방식이다.
한편 입출고 과정을 영상으로 촬영, 고객에게 전송하는 시스템도 갖췄다. 주요 품목인 환경 가전에 대해선 분해 정밀 클리닝 서비스도 시행한다. “전원도 안 켜지던 제품을 이렇게 새로 쓰게 되리라 생각하지 못했어요.” “반짝반짝 새것처럼 변신해서 왔어요.” 누리집에 올라온 후기에서 고객들의 만족도가 느껴진다.
“과거 동네마다 있던 전파사의 현대판 모델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신 대표는 인라이튼 소속 장인들이 각종 생활가전들을 수리하는 모습을 보며 이렇게 설명했다. 현재 직원 수는 약 20명. 이곳에선 오래전부터 전자제품을 직접 고치는 일을 했고 이 분야에서 잔뼈가 굵은 중장년층 기술 장인과 전자·전기 분야를 전공한 특성화고·마이스터고 청년들이 함께 일한다.
“더 나은 서비스를 만들고자 과거 용산이나 세운상가 등에서 일한 기술 장인들을 모셨습니다. 필요 부품만 교체하는 정밀한 수리 방법과 정밀 클리닝 서비스 등은 기술 장인들 덕분에 할 수 있습니다. 기술 장인의 노하우를 젊은 세대가 전승하지 않으면 기술 자산이 사라질 수밖에 없죠. 그래서 미래 기술 장인을 꿈꾸는 청년들에게 노하우를 전수할 수 있도록 하고 있습니다.”
소비자 직접 수리 참여하는 ‘리페어카페’
사실 모든 전자제품을 수리해 쓰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다. 인터넷 최저가로 2만 원에 구입한 제품을 적잖은 돈을 들여 수리할 바엔 차라리 2만 원 주고 새로 사는 게 낫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대다수다. 신 대표는 “이런 경우를 두고 ‘수리 효용성이 낮은 제품’이라고 부른다”고 설명한다. 제품 가격이 100만 원, 수리 비용이 5만 원이라면 수리 효용성이 높은 것이지만 반대로 수리 효용성이 낮을 경우 ‘고쳐 써보라’는 제안은 의미가 없다.
소비자가 돈을 내지 않고 직접 수리해볼 수 있는 경험을 제공한다면 어떨까? 인라이튼은 이런 뜻에서 ‘리페어카페’라는 특별한 프로그램도 운영한 바 있다. 소비자가 고장 난 전자제품을 직접 수리할 때 인라이튼 측에서 수리에 필요한 공구와 기술 장인들의 상담과 조언 등을 제공하는 식이다.
2019년 11월 서울에서 처음 열렸던 리페어카페에는 주말 하루 동안 약 150명이 방문해 고장 난 제품을 직접 고쳐서 돌아갔다. 4년 넘게 전자제품 수리 서비스를 운영한 노하우와 기술 장인의 내공 등이 더해져 성공적으로 진행할 수 있었다.
“지방자치단체와 서울새활용플라자 등이 함께 기획해 고객이 비용 부담 없이 참여할 수 있도록 했어요. 시민들에겐 스스로 수리해보고 다시 쓰게 하는 경험을 선사하고 기업과 지자체에서 의미 있는 곳에 예산을 쓰도록 만든 방식이었죠. 서울에서 한 번, 청주에서 두 번 열었는데 모두 반응이 좋았습니다. 요청이 온다면 여력이 되는 한 더 진행해보고 싶습니다.”
▶서울 성동구 서울새활용플라자. 예약하면 새활용탐방, 새활용체험을 할 수 있다.
전자폐기물 중립 기업이 꿈꾸는 세상
신 대표는 요즘 저가의 중소형 가전 관련 유통 플랫폼도 준비 중이다. 중소형 가전은 제조사와 유통 판매자가 다른 경우가 많다. 이 상황을 고려해 고객과 접점을 만들어주는 플랫폼을 구축해보겠다는 구상이다.
“제품을 오래 쓰기 위해선 기본적으로 품질이 좋아야 합니다. 애초 제품을 잘 만들지 않으면 아무리 유지·보수를 잘한다 해도 오래 쓰기 어렵죠. 그래서 우리가 샘플을 수입해 뜯어보고 유지·보수하기 좋은 제품과 오래 사용할 수 있고 성능 좋은 제품 등을 엄선해 컬렉션을 만들었어요. 여기에 브랜드를 입혀 판매하고 제품들이 절대 폐기물이 되지 않도록 관리하는 등 새로운 도전을 해보려고 합니다.”
이에 더해 ‘리페어맵’ 플랫폼도 만들 계획이다. 전자제품뿐 아니라 시계, 카메라, 구두 등 다양한 분야 수리와 수선 장인의 정보를 지도화해(맵핑) 소비자들과 잇게 하는 플랫폼이다.
“우리는 전자폐기물 중립 기업입니다.” 인터뷰에서 신 대표가 제일 먼저 했던 말이다. ‘We Fix the World. 더 오래가는 세상을 꿈꿉니다.’ 인라이튼 작업실 벽에 적혀 있는 이 문구는 우리에게 전자제품을 고쳐서 써야 하는 이유를 말해준다. ‘되살린 제품 4만 9637개, 나무 심은 효과(이산화탄소 절감량) 53만 6079그루’. 더 오래가는 세상을 꿈꾸며 시작한 인라이튼의 도전이 세상에 밝은 빛을 더해주고 있음을 나날이 커지는 이 숫자들이 증명해주고 있다.
글 김청연 기자, 사진 곽윤섭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