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세기 오스트리아는 중부 유럽 최강국이었다. 당시 오스트리아를 지배하던 합스부르크 왕가는 신성로마제국 황제 배출의 산실로 유럽 역사상 가장 긴 세월 동안 절대 왕권을 행사한 명문가였다. 합스부르크 왕실 권력은 1차 세계대전 패전으로 오스트리아 왕정이 폐지될 때까지 600년 이상 계속됐으며 특히 알브레히트 5세(재위 1438~1439)~프란츠 2세(재위 1792~1806)까지 400년 가까이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를 독점했다.
이 시기, 합스부르크 왕실의 중앙정부 겸 신성로마제국의 베이스캠프였던 오스트리아의 빈은 유럽 최고의 정치·문화 도시로 이름을 떨쳤다. 합스부르크 가문의 영화와 역사가 살아 숨 쉬는 현장이 빈인 것도 그런 까닭에서다. 당대 최고 정치 권력의 본산지 빈을 향한 구애는 문화 권력도 마찬가지였다. 전성기 시절 프랑스를 제외한 유럽 영토 대부분을 휘하에 둔 합스부르크 왕실의 수도 빈에는 역사적인 유적들이 속속 들어섰다.
18세기 중엽 신성로마제국 황후 및 오스트리아 대공녀 겸 헝가리·보헤미아·크로아티아 여왕을 지낸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1717~1780, 재위 1740~1780)의 여름 궁전으로 건축된 쇤브룬 궁전이 대표적이다. 50만 평의 광활한 대지 위에 1441개의 방을 갖춘 화려한 바로크 양식의 궁전은 합스부르크 왕가 위엄의 상징이다. 오스트리아에서 규모가 가장 큰 궁전인 쇤브룬 궁전은 1996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선정되었으며 세계 최초의 동물원인 빈 동물원이 쇤브룬 궁전 안에 있다.
신성로마제국의 베이스캠프, 문화의 도시 빈
쇤브룬 궁전이 여름 궁전이라면 호프부르크 궁은 겨울 궁전이다. 호프부르크 궁은 13세기 초 처음 건설된 뒤 후대 왕들이 주도한 계속된 증축 공사 끝에 16세기 초 지금의 르네상스 양식으로 완성됐다. 오스트리아 대통령 관저가 호프부르크 궁 안에 있을 만큼 역사성을 인정받고 있다.
바로크 양식과 르네상스 양식이 가미된 오스트리아에서 가장 오래된 고딕식 성당인 슈테판 대성당(St. Stephen's Cathedral)도 빈의 상징물(랜드마크)로 널리 알려져 있다. 12세기 건립 당시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설계됐으나 14세기 중반 재건 때 고딕 양식을 도입했다. 이후 18세기에 대대적인 성당 내부 공사를 시행했는데 이때 사용된 건축양식은 바로크 양식이었다. 아름다운 모자이크 문양으로 장식된 23만 개의 기와로 마감한 독특한 형태의 지붕이 인상적이며 137m에 이르는 남쪽 탑과 67m 높이의 북쪽 탑은 르네상스 양식으로 지어졌다.
무엇보다 빈에는 오스트리아가 중부유럽의 패권국이던 시절의 영광을 화석처럼 간직한 유서 깊은 건물이 있는데 바로 벨베데레 궁전이다.
궁전의 주인은 17세기 이탈리아와 스페인을 무대로 군주를 배출하는 등 명문 귀족 가문이었던 사보이 가문의 아들 외젠 사부아 공(公)(1663~1736)이다. 파리에서 태어났지만 군인의 꿈을 이루기 위해 오스트리아로 넘어가 신성로마제국과 합스부르크가의 육군 원수를 지내는 등 당대 최고의 장군으로 명성을 날린 인물이다.
특히 신성로마제국에 맞서 호시탐탐 패권을 넘보던 오스만제국과 여러 차례에 걸친 전쟁을 승리로 이끌어 합스부르크가의 영웅으로 추앙받는 등 왕에 버금가는 인기를 누렸다. 그의 이름에 독일어로 왕자라는 뜻의 프린츠(prinz)가 붙는 이유다.
외젠 공이 세운 벨베데레 궁전은 유럽의 바로크 양식 건축물 중 아름답기로 소문난 곳이며 프랑스식으로 꾸며진 정원과 주변 경치 또한 일품이다. 궁전은 상궁과 하궁, 2개로 이뤄져 있다. 남녀 간의 사랑을 예술로 승화시켜 표현한 작품 중 단연 첫 손에 꼽히는 구스타프 클림트(1862~1918)의 ‘키스’(1908)가 상궁에 전시돼 있다.
빈은 또 음악의 도시다. 모차르트(1756~1791), 슈베르트(1797~1828), 하이든(1732~1809)을 배출했으며 독일 출신인 베토벤(1770~1827)과 브람스(1833~1897)도 빈에서 음악 인생을 꽃피웠다.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는 베를린 필하모닉과 함께 세계 오케스트라의 양대 산맥으로 꼽힌다.
새로운 건축 기법 활용한 공공 건축물
링 슈트라세는 오스트리아 수도 빈의 중심부를 관통하는 순환도로다. 1850~1890년대에 전면적인 도시 개조 작업을 위한 공공 건축 프로젝트의 하나로 방어용 옛 성벽을 허물고 그 자리에 고리 모양처럼 동그랗게 뚫은 폭 56m, 길이 5.3km의 환상(環狀)도로다.
링 슈트라세는 구시가지를 감싼 형태로 시가지의 안과 밖을 구분하는 경계 역할을 하는데 도로를 중심으로 고대 그리스, 고딕, 르네상스 건축법을 혼용한 링 슈트라세 양식이라 불리는 새로운 건축 기법을 활용한 공공 건축물들이 대거 들어섰다. 현재 링 슈트라세를 따라 모두 500여 개의 건물이 몰려 있다.
순환도로 곁에 맨 먼저 등장한 건물은 1869년에 지은 빈 국립 오페라극장이다. 장식성이 뛰어난 신르네상스 건물인 오페라극장은 2차 세계대전 당시 연합군의 공습으로 파괴된 뒤 1955년 재건됐다.
대법원, 빈 고등법원 등으로 사용 중인 정의의 궁전은 1881년 신르네상스 방식으로, 빈 자연사박물관과 빈 미술사박물관은 1889년과 1891년 르네상스 양식으로 잇따라 준공됐다.
1874년에 공사를 시작해 1883년에 고대 그리스 양식으로 완공한 오스트리아 의회 의사당도 정의의 궁전 옆에 자리하고 있는데 고대 그리스 신전을 닮았다. 같은 해에 높이 솟은 뾰족한 첨탑이 인상적인 네오고딕 양식의 빈 시청사도 의사당에서 걸어서 5분 거리에 건축됐다. 여름에는 필름 페스티벌이, 겨울에는 크리스마스 시장이 열리는 명소다. 링 슈트라세 한가운데에 마리아 테레지아 광장이 있고 광장 중앙에 그를 기념하는 동상이 서 있다. 벨베데레 궁전과 쇤브룬 궁전은 링 슈트라세 바깥 외곽에 있다.
‘전망 좋은’ 벨베데레 궁전 미술관의 구조
벨베데레는 독일어로 전망이 좋은 곳이란 뜻이다. 시야를 가리지 않고 멀리 내다보려면 평지보다 높은 위치일수록 유리하다. 벨베데레 궁전도 빈 남동쪽 외곽의 완만하게 경사진 언덕 자리에 있다. 미술관 건물은 언덕 위쪽에 들어선 상궁과 상궁을 마주 보고 그 아래에 자리한 하궁, 상·하궁 사이에 드넓게 펼쳐진 정원, 식물원이었던 오랑제리, 1950년대식 건물을 현대조각미술관으로 꾸민 벨베데레 21로 구성돼 있다.
미술관의 중심은 당연히 메인 궁전인 상궁이다. 오스만튀르크 전쟁의 영웅 외젠 공이 대규모 연회를 개최할 목적으로 6년간 공을 들여 1723년에 지은 웅장하고 화려한 바로크 양식의 궁전이다. 특히 설계를 맡은 후기 바로크 건축양식의 거장 루카스 본 힐데브란트(1668~1745)는 궁전 꼭대기 층과 바로 아래층 맨 위에 율동미와 생동감이 넘치는 조각상들을 줄지어 배치해 궁전 건축에 음악적 효과를 각인시킨 것으로 유명하다. 군사공학자이기도 했던 힐데브란트는 외젠 공을 도와 직접 전투에 참여했으며 합스부르크 제국의 건축양식에 큰 영향을 끼쳤다.
힐데브란트는 상궁에 앞서 1716년 외젠 공이 여름 궁전으로 사용됐던 하궁도 건축했다. 궁전의 이름처럼 궁전에서 바라보는 탁 트인 경치가 일품이다. 두 궁전 사이에 놓인 프랑스식 정원도 아름다운 풍광으로 명성이 높다. 외젠 공 사망 후 궁전의 소유는 합스부르크가로 넘어갔으며 이후 황제의 거처나 미술품과 각종 문서 보관소로 활용되기도 했다.
궁전이 미술관으로 개관한 시기는 하궁이 1903년, 상궁이 1919년이다. 궁전을 모태로 한 미술관은 상궁이 지하층, 지상층, 1층, 2층으로 이뤄져 있으며 빨간색 지붕이 눈길을 끄는 하궁은 지하층과 지상층의 단아한 구조다. 1950년대에 지어진 지하층, 지상층, 1층 형태의 벨베데레 21은 2011년부터 오스트리아를 포함한 국제 현대미술 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다. 상궁 1층의 마블 홀은 1955년 5월 오스트리아가 영세중립국으로 나아가는 디딤돌이 된 ‘오스트리아 국가조약’이 이뤄졌던 장소다. 벨베데레 궁전과 정원은 2001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됐다.
벨베데레 궁전 미술관의 상징 구스타프 클림트
중세시대부터 바로크 미술, 신고전주의, 낭만주의, 사실주의, 인상주의 등 근·현대미술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작품을 보유하고 있다. 소장품은 거의 다 상궁에 있으며 상궁 전시는 상설전으로 진행된다. 하궁은 특별기획전 위주로 펼쳐진다.
우리에게도 익숙한 카미유 코로(1796~1875), 오노레 도미에(1808~1879), 장 프랑수아 밀레(1814~1875), 에두아르 마네(1832~1883), 에드가르 드가(1834~1917), 클로드 모네(1840~1926), 오귀스트 르누아르(1841~1919), 에드바르 뭉크(1863~1944)에다 빈센트 반 고흐(1853~1890)까지 시대를 빛낸 거장들 작품을 볼 수 있다.
벨베데레 궁전 미술관의 하이라이트는 오스트리아의 국보급 화가로 세계적인 명성을 자랑하는 구스타프 클림트와 에곤 실레(1890~1918), 그중에서도 클림트 컬렉션이다.
클림트 하면 떠오르는 그림이 ‘키스’다. 사랑에 빠진 연인들의 황홀한 감정 상태를 그린 그림이다. 눈부시게 찬란한 금박 문양과 기하학적 패턴을 사용해 키스 장면을 몽환적인 에로티시즘으로 표현한 걸작 중의 걸작이다. 금박 형상과 복잡한 기하학적 무늬로 에로티시즘의 품격을 숭고하고 감동적인 예술로 승화시켰다. 클림트가 오스트리아 상징주의의 대부로 불리는 이유다.
클림트의 그림은 압도적인 관능미가 지배적이다. 동시에 그것을 넘어서는 순수한 사랑을 지향하는 묘한 울림이 있다. 보는 이를 무아지경에 빠지게 한다는 점에서 에로티시즘 회화의 위상을 고급예술로 격상시켰다는 평가를 받는다. 오스트리아 정부는 1908년 ‘키스’를 직접 매입했다. 이 한 점의 그림으로 벨베데레 궁전 미술관은 단숨에 전 세계에 알려졌다.
28세의 나이로 요절한 오스트리아의 또 다른 천재 화가 실레는 클림트의 제자답게 초기에는 스승의 화풍을 이어받았지만 20세 무렵부터 자신만의 독창적인 누드 그림을 그려나갔다. 인체의 뒤틀린 묘사, 굵고 거친 윤곽선, 노골적이고 자극적이면서 충동적인 성애 그림이라는 점에서 클림트와는 결이 다르다. 12년간의 짧은 기간 동안 300여 점의 유화를 남겼으며 자화상 그림도 100점이 넘어 삶과 죽음, 정체성에 대한 남다른 고민을 엿볼 수 있다. 스페인 독감으로 생을 마쳤다.
박인권 문화 칼럼니스트_ PIK문화연구소 소장으로 전 <스포츠서울> 문화레저부 부장과 한국사립미술관협회 팀장을 역임했다. 주요 저서로는 <시와 사랑에 빠진 그림> <미술전시 홍보, 이렇게 한다>, 미술 연구용역 보고서 ‘미술관 건립·운영 매뉴얼’ ‘미술관 마케팅 백서’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