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희경의 첫 장편 <새의 선물>은 “열두 살 이후 나는 성장할 필요가 없었다”고 생각하는 조숙한 소녀가 주인공이자 화자인 성장소설이다. 1969년 남도의 지방 소읍을 배경으로 해 열두 살 소녀의 눈으로 바라보는 세상 일들과 사람들 이야기다.
주인공이 여섯 살 때 어머니는 자살했고, 아버지는 사라졌다. 외할머니 슬하에서 이모, 삼촌과 함께 사는 ‘나’는 삶의 이면을 볼 줄 아는 조숙한 소녀다. 이 소녀는 남에게 ‘보여지는 나’와 자신이 ‘바라보는 나’를 분리하면서 빠른 눈치로 주변 일과 사람들을 관찰해 나간다. 이 책 뒷면에 ‘생의 진실에 던지는 가차없는 시선!’이라고 씌어 있는데, 이 소설 특징을 잘 잡아낸 문구 같다.
나오는 인물들은 한결같이 어린 시절 한번쯤 본 듯한 이웃들이다. 철없지만 순수한 이모, “밤에 돌아다니는 계집들은 사내들한테 익혀놓은 음식”이라며 딸 단속하는 할머니, 외아들만 믿고 사는 과부 ‘장군이 엄마’, 바람둥이 광진테라 아저씨, 착하고 인정 많은 광진테라 아줌마, 이모를 짝사랑하는 순정파 깡패 홍기웅…. 등장인물들은 저마다 개성이 생생하게 살아 있다.
소설가 윤흥길은 이 소설에 대해 “시종 웃음을 자아내게 하는 해학적인 문체와 치밀한 심리묘사, 특히 동생을 등에 업은 채 천방지축 팔방놀이를 하는 소녀, 늘 가출을 꿈꾸면서도 버스가 떠난 다음 먼지구름속에 남아 있는 광진테라 아줌마의 묘사 등은 참으로 압권”이라고 했다.
특히 이모에 대한 묘사가 해학적이다. “물에서 씻어 막 건져낸 자두처럼 싱싱”하지만, “스무 살을 어디로 다 먹었는지 어른스러운 모습을 느낄 수가 없는” 인물이다. 게다가 “걸음마를 배운 이래 제대로 걸어본 적이 없어” 걷다가 자주 넘어지는 아가씨다. 이모는 펜팔로 사귄 군인과 교제하다가 자신의 절친에게 빼앗기는 아픔을 겪는다. 그 다음에는 삼촌의 서울 친구인 허석을 놓고 열두 살인 ‘나’와 연적 관계를 이룬다.
이 소설에는 사과꽃이 열두 살 소녀의 풋사랑을 상징하는 꽃으로 나온다. 소설 중간쯤 다음과 같은 대목이 있다.
“가슴이 설레는 걸 보면 진정 나는 사랑에 빠진 모양이다. 과수원이 가까워질수록 꽃향기가 진해진다. 사과꽃 냄새다. 삼촌과 허석이 앞서서 걷고 그 뒤를 나와 이모가 따라간다. 어두운 숲길에는 정적이 깃들어 있고 사과꽃 향기와 풀벌레 소리, 그리고 하늘에는 별도 있다. 나에게 느껴지는 것은 다만 허석, 그와 밤 숲길과 사과꽃 향기뿐이다. 사과꽃 향기에 싸여 그와 내가 봄 숲길을 걸어가고 있는 것이다.”(202쪽)
초록색 안개에 싸인 과수원의 사과나무꽃은 황혼을 배경으로 서 있는 남자의 실루엣과 함께 이 소설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아름다운 장면이다. ‘나’는 허석이 그리우면 8월의 뜨거운 햇볕을 받으며 풋사과가 매달린 과수원길을 한없이 걷는다. 풋사랑이라 당연히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지만….
생각해 보니 10년 넘게 꽃을 찾아다녔으면서도 사과꽃을 주의깊게 관찰한 적은 없는 것 같다. 내년 봄엔 가까운 과수원에라도 들러 자세히 보면서 향기도 꼭 맡아봐야겠다.
작가 은희경은 1959년 전북 고창에서 태어나 숙명여대 국문과를 졸업했다. 두 달 만에 썼다는 <새의 선물>로 1995년 제1회 문학동네 소설상을 받으면서 유명 작가 반열에 올랐다. 1997년 소설집 <타인에게 말걸기>로 동서문학상, 1998년 단편 <아내의 상자>로 이상문학상도 받았다.
글·김민철(조선일보 기자·<문학 속에 핀 꽃들> 저자) 2013.12.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