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에서 악기 연주자들이 돌아가며 단독으로 현란한 솜씨를 뽐내는 코너가 있다. 꽃구경을 다니다 보면 꽃들도 돌아가며 아름다움을 뽐낸다는 인상을 받는다. 이즈음은 아카시아꽃 차례인 것 같다. 요즘 어디를 가나 아카시아꽃 향기가 진하다.
애니메이션 영화로도 나온 황선미의 장편동화 <마당을 나온 암탉>에서는 아카시아나무가 주인공 암탉에게 꿈을 주는 나무다. 주인공 ‘잎싹’은 철망 속에서 알을 낳는 양계장 닭이었다. 그런데 파란 아카시아 잎사귀가 향기로운 꽃을 피워내는 것을 보고 알을 품어 병아리를 탄생시키고 싶다는 꿈을 갖는다.
눈부신 바깥. 마당 끝에 있는 아카시아나무에 새하얀 꽃이 피었다. 꽃향기가 바람을 타고 양계장까지 들어와 잎싹의 가슴속으로 스며들었다. 잎싹은 저도 모르게 벌떡 일어나 철망 틈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잎사귀가 또 꽃을 낳았구나!’
잎싹은 아카시아나무 잎사귀가 부러웠다.
잎싹은 꿈이 생기자, 죽음을 무릅쓰고 양계장 밖으로 나온다. 양계장 밖은 사나운 족제비가 호시탐탐 목숨을 노리는 위험한 세계였다. 잎싹은 부화란을 낳지 못하지만, 우연히 야생 오리인 ‘나그네’의 알을 품어 ‘초록머리’를 탄생시킨다.
초록머리는 잎싹의 헌신으로 늠름한 청둥오리로 변해 갔다. 그러나 초록머리는 청둥오리로 살아가야 했기에, 잎싹을 남겨두고 북쪽 겨울나라로 떠나야 했다. 끝까지 족제비의 위협에서 초록머리를 지킨 잎싹은 결국 굶주린 족제비에게 자신의 몸을 내주면서 생을 마감한다.
책 도입부에서 ‘꿈’을 상징한 아카시아 꽃잎이 마지막 부분에 잎싹이 죽음을 맞이할 때 다시 등장한다.
눈발이 흩날리기 시작했다. 바람에 나부끼는 눈을 보는 동안 잎싹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아, 아카시아꽃이 지는구나!’
잎싹의 눈에는 흩날리는 눈발이 마치 아카시아 꽃잎처럼 보였다.
“카악!” 날카로운 소리가 났다. 순간 모든 것이 사라졌다. 아카시아 꽃잎도, 향기도, 부드러운 바람까지도. 잎싹의 앞에는 굶주린 족제비가 있을 뿐이었다.
“그래, 너로구나.”
잎싹은 굶주려서 퀭해진 족제비의 눈을 보면서 물컹하던 어린것들을 떠올렸다. (중략)
“자 나를 잡아먹어라. 그래서 네 아기들 배를 채워라.”
<마당을 나온 암탉>은 청소년용이지만 어른들이 읽어도 손색없는 글이다. 암탉은 양계장에서 편하게 먹고 알을 낳으며 살 수 있었다. 그러나 탈출해 고통스럽지만 자신의 꿈과 자유, 그리고 사랑을 실현해 나가는 과정이 팽팽한 긴장감 속에 그려져 있다. 삶과 죽음, 먹는 자와 먹히는 자가 순환하는 자연의 구조도 생각해 볼 거리를 제공하고 있다.
서정적인 문체, 따뜻한 묘사도 좋다. 국내에서 100만부 이상 팔렸고 올 봄 영국에서 출간 한 달 만에 베스트셀러에 오르기도 했다.
아카시아나무는 초여름에 활짝 피어 향긋한 꽃향기를 주고 어린시절 추억도 떠올리게 해 주는 나무다. 포도 송이처럼 주렁주렁 달린 꽃은 어린 시절 허기를 달래는 간식거리였고 깃털처럼 줄줄이 달린 잎은 다양한 놀이의 도구였다. 아카시아나무의 정식 명칭은 ‘아까시나무’다.
진짜 아카시아(Acacia)나무는 열대지방에서 자라는 다른 나무라고 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아카시아’라는 친숙하고 정감 어린 이름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마당을 나온 암탉>에서도 아카시아나무라고 쓰고 있다. 학자들이 왜 한 세기 가까이 문제없이 써온 말을 바꾸어 혼란을 주고 있는지 모르겠다.
글과 사진·김민철(조선일보 기자·<문학 속에 핀 꽃들> 저자) 2014.05.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