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여 년 전 언론사 입사 때 보던 작문 시험의 단골 주제는 ‘어머니’였다. 당연히 ‘어머니’에 대비했는데 시험장에 가보니 주제가 ‘아버지’였다. 순간 난감했지만, 다행히 양귀자의 단편 <한계령>이 떠올랐다.
이 소설은 아버지가 일찍 세상을 떠난 집안에서 동생들을 책임지느라 숨가쁘게 살아온 큰오빠가 동생들이 모두 자립하자 허망해하는 것이 주요 뼈대 중 하나다. 당시 우리 아버지도 고생고생해 키운 자식들이 모두 품에서 떠나자 허탈해하셔서 자식 입장에서 송구스럽던 상황이었다. 이 소설 속 큰오빠와 우리 아버지를 대비시켜 글을 쓴 기억이 있다.
소설에서 작가인 여주인공은 25년 만에 고향 친구 박은자의 전화를 받는다. 은자는 고향을 떠올리는 출발점 같은 존재였다. 은자만 떠올리면 고향의 기억들이 ‘손에 잡힐 듯’ 다가오는 것이다. 은자는 부천의 한 나이트클럽에서 노래 부르는 ‘미나 박’으로 나름 성공했다며 꼭 한번 찾아오라고 했다. 그러나 여주인공은 현실의 은자를 만나면 고향의 추억까지 사라질까봐 망설인다.
이즈음 여주인공은 50대 큰오빠가 동생들이 모두 성장해 자리를 잡아 ‘장남의 멍에’에서 벗어나자 허탈해하면서 술로 세월을 보내고 있다는 소식을 듣는다. 은자는 계속 오라고 재촉하고, 여주인공은 은자는 만나지 않고 노래만 듣고 올 수는 없을까 궁리한다. 작가는 그 마음을 진달래를 통해 절묘하게 담았다.
“진달래가 흐드러지게 피었더라고, (중략) 남편은 원미산을 다녀와서 한껏 봄소식을 전하는 중이었다. 원미동 어디에서나 쳐다볼 수 있는 길다란 능선들 모두가 원미산이었다. 창으로 내다보아도 얼룩진 붉은 꽃무더기가 금방 눈에 띄었다. 진달래꽃을 보기 위해 꼭 산에까지 가야만 된다는 법은 없었다. 나는 딸애 몫으로 사준 망원경을 꺼내어 초점을 맞추었다. 진달래는 망원경의 렌즈 속에서 흐드러지게 피어났고 새순들이 돋아난 산자락은 푸른 융단처럼 부드러웠다. 망원경으로 원미산을 보듯, 먼 곳에서 은자의 노래만 듣고 돌아온다면?”
마침내 주인공은 미나 박의 공연 마지막 날 나이트클럽에 간다. 은자로 보이는 여가수가 부르는 노래는 ‘아, 그러나 한줄기 바람처럼 살다가고파. 이 산 저 산 눈물구름 몰고 다니는 떠도는 바람처럼’, ‘저 산은 내게 내려가라, 내려가라 하네. 지친 내 어깨를 떠미네…’라는 가사가 나오는 양희은의 노래 ‘한계령’이었다. 여주인공은 노래를 들으며 큰오빠의 지친 뒷모습이 떠올라 눈물을 흘린다.
<한계령>은 소설집 <원미동 사람들>에 나오는 단편 중 하나다. 양귀자는 1980년대 부천 원미동에 살면서 이곳을 배경으로 서민들의 애환과 삶을 담았다. 부천시 원미구는 2007년 원미산 입구에 양귀자 ‘글비’를 세우면서 위에 인용한 대목을 새겨넣었다.
진달래는 잎이 나기 전에 꽃이 먼저 피어 철쭉과 쉽게 구분할 수 있다. 또 꽃잎이 매우 얇다. 진달래는 꽃을 먹을 수 있어 ‘참꽃’, 철쭉은 먹을 수 없어 ‘개꽃’이라 부른다. 지난 주말 뒷산에 오른 김에 진달래 꽃잎을 따먹어보니 약간 시큼한 맛이 났다. 철쭉은 꽃과 잎이 함께 피고, 진달래보다 연한 분홍색이다. 진달래와 달리 꽃잎 안쪽에 붉은 반점이 있다. 피는 시기도 진달래는 3~4월이지만, 철쭉은 5~6월이다.
진달래가 온 산에 피는 계절이다. 지난주까지만 해도 꽃몽우리만 있더니 약속이나 한 듯 한꺼번에 피어났다. 진달래가 다 지기 전에, 이번 주말에는 가까운 산이라도 찾아보면 어떨까.
글과 사진·김민철(조선일보 기자·<문학 속에 핀 꽃들> 저자) 2014.0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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