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춘천시 의암공원에 자리 잡은 윤희순 동상. 윤희순은 글과 노래로 의병 활동을 독려하고 독립군을 훈련시키는 최초의 여성 의병대장이다.
“금수보다 못한 인간들아. 너희 부모 살을 베어 남을 주고도 너희 부모는 살 수 있나. 왜놈의 앞잡이 놈들 참으로 불쌍하고 애달프다.”
자신의 영달을 위해 민족을 배신하고 일제에 협력한 배반자들을 향한 경고문이다. 새파랗게 날이 서 있다. 민족에 대한 배반을 부모의 살을 베어 주는 것으로 비유했다. 마구 욕만 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을 불쌍하고 애달프다고 표현했다. 같은 민족에 대한 사랑이 애잔하게 스친다. 이 글의 제목은 ‘일제 앞잡이에 대한 경고’다. 경고는 계속된다. 이번에는 ‘왜놈 대장 보거라’이다.
“너희 놈들 우리나라 욕심나면 그냥 와서 구경이나 하고 가지… 민비를 살해하고도 너희 놈들이 살아서 가기를 바랄쏘냐. 이 마적떼 오랑캐야 좋은 말로 할 때 용서를 빌고 가거라.”
결기가 하늘을 찌른다. 무도한 일제에 대해 용서를 빌라고 했다. 다들 잔혹한 일제의 고문에 몸을 사릴 때 공개적으로 글을 통해 통렬한 공격을 퍼부었다. 놀랍게도 익명으로 공격한 것이 아니다. 글 말미에 자신의 이름 석자를 분명하게 명시했다. ‘조선 선비의 아내 윤희순’
조선시대 완고한 유학자 집안의 며느리였던 윤희순(1860~1935)은 최초의 여성 의병장이다. 단순히 글로만 일제에 항거한 것이 아니다. 여성 의병대를 조직해 남성들과 함께 군사훈련을 하고 전투를 준비했다. 쇠를 녹이고 유황을 섞어 화약과 총탄을 만들어 항일 투쟁에 참여했다. 독립운동가였던 시아버지의 유지를 받들어 만주에서 교육활동과 독립운동을 한 능동적이고 주체적인 깨어 있는 활동가였다. 온몸으로 일제에 항거한 윤희순은 자신은 물론 자신의 아들의 생명까지 독립운동에 희생한 열혈 여성이었다.

▶춘천 남면 발산리에 있는 윤희순 생가

▶윤희순 생가의 우물 터
윤희순의 숨결 느낄 수 있는 의암공원
일제강점에서 해방된 광복절을 앞두고 독립투사 윤희순의 발자취를 따라 춘천으로 가보자. 용감한 조선 여성 지도자의 흔적을 찾아보는 것은 의미 있는 여행이다. 의암공원은 호반의 도시 춘천에 스며 있는 윤희순의 숨결을 처음 느낄 수 있는 곳이다.
의암공원에는 윤희순의 동상이 있다. 의암공원은 춘천을 대표하는 독립운동가 의암 유인석(1842~1915)을 기리는 공원이다. 의암은 1876년 병자수호조약을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고 의병대를 조직해 전투를 벌이다가 패해 만주로 망명해 12도의군 도총재로 추대된 인물이다. 그의 육촌형 유홍석(1841~1913)은 의암과 함께 독립운동을 한 인물로 유희순의 시아버지다. 의암의 동상을 배경으로 당당하게 서 있는 윤희순은 한 손에 책을 들고 한 손은 힘차게 앞으로 뻗으며 큰 소리를 치고 있다. 눈을 부릅뜨고 일제와 일제의 앞잡이들을 향해 불호령을 내리고 있다.
윤희순은 경기도 구리에서 윤익상과 평해 황씨 사이에서 큰 딸로 태어났다. 윤익상은 인조반정 공신이었던 윤희평의 후손으로 대대로 유학자 집안. 윤희순은 16세가 되던 해 고흥 유씨 집안의 유제원과 결혼해 춘천 남면 발산리에서 거주했다. 이곳은 고흥 유씨 집안의 집성촌이다.
결혼 초야에 신방을 엿보던 동네 주민들이 실수로 횃불로 처마에 불을 내는 바람에 신혼방이 타버리는 사고가 발생했다. 당시 신부 윤희순은 거추장스러운 치마 저고리를 벗어던지고 물동이를 나르며 불을 끄는데 적극적으로 참여해 주변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남편 유제원은 유홍석의 장남이며 의암의 조카인 셈이다.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늠름하게 서 있는 윤희순을 마주하면 자신도 모르게 옷깃을 여미게 된다.

▶춘천시 남면 가정리 의암 유인석기념관에 있는 의암 어록비와 흉상
생가 터 마당에 세워진 ‘윤희순 의사 노래비’
이제 의암공원에서 승용차로 40분 거리인 춘천시 남면 발산리로 가보자. 윤희순 생가가 있다. 이 유적지는 아직 건물의 소유주인 윤희순의 후손이 관리하고 있다. 4월에 경매로 넘어가 생가가 사라질뻔 했으나 가까스로 후손이 다시 매입해 위기를 넘겼다. 춘천시가 한때 생가 터를 매입해 관리하려 했으나 무산됐다.
생가 터 한쪽에는 윤희순이 전쟁터에 나간 시아버지와 남편을 포함한 의병들의 안녕을 정한수를 놓고 빌던 우물 터가 있다. 지금은 관리가 안돼 주변의 나무가 우물을 거의 덮고 있어 기도한 장소라는 조그만 안내문을 보지 못하면 우물을 발견하기도 어렵다.
윤희순은 시아버지에게 자신도 항일 투쟁에 나서고 싶다며 전쟁터에 동행하기를 애원했으나 거절당했다. 유교 중심의 문화가 여성이 총을 들고 남성과 함께 행동하는 것을 허용하지 못한 것이다. 의병부대가 마을로 들어와 밥을 달라고 요구하면 가족들이 먹어야 할 쌀과 춘천 숯장수들이 숯을 사기 위해 갖다 놓은 곡식까지 몽땅 털어 밥을 지어주었다.
의병을 진압하는 관군에게 “우리나라 좀벌레 같은 놈들아. 어디 가서 살 수 없어 오랑캐나 좇는단 말인가. 오랑캐를 잡자 하니 내 사람을 잡겠구나. 죽더라도 서러워 마라 우리 의병들은 금수를 잡는 것이다”라고 하면서 관군을 좀벌레로 취급하는 글을 쓰기도 했다.
생가터 마당에는 ‘윤희순 의사 노래비’가 세워져 있다. 남자들이 전쟁터에 나간 뒤 남아 있는 여자들도 의병을 도와줄 길을 찾아 적극적으로 행동하자는 내용이다. 윤희순은 이 노래의 가사를 쓰고 직접 곡도 붙여 길거리에서 부르기 시작했다.
처음엔 시큰둥하던 동네 아낙네들은 유학자 집안의 며느리가 줄기차게 부르는 노래를 자신들도 모르게 따라하기 시작했다. 그 노래의 가사는 어떤 꾸밈이 없이 조선의 여성들에게 행동할 것을 요구한다. 마을 여성들을 모아놓고 “비록 여자라 해도 나라를 구하는 데에는 남녀의 구별이 있을 수 없다”며 의병을 함께 도울 것을 요구했다. 제목은 ‘안사람 의병가’다.
그 노래 가사 전문이다.
“우리나라 의병들은 나라 찾기 힘쓰는데 우리들은 무얼 할까 의병들을 도와주세/내 집 없는 의병대들 뒷바라지 하여 보세/우리들도 뭉쳐지면 나라 찾기 운동이요 왜놈들을 잡는 것이니 의복 버선 손질하여 만져 주세/의병들이 오시거든 따뜻하게 만져 주세/우리 조선 아낙네들도 나라 없이 어이 살며 힘을 모아 도와주세/ 만세 만세 만만세요 우리 의병 만세로다.”

▶춘천시 남면 가정리 의암 유인석기념관에 있는 의암 어록비와 흉상

▶윤희순 생가 마당에 있는 ‘안사람 의병가’ 노래비
낮에는 농사일 하고 밤에는 항일 군사훈련
1907년 일제는 고종 황제를 강제로 물러나게 하고 조선 군대를 해산시켰다. 전국적으로 의병이 일어났다. 윤희순은 이제 붓 대신 무기를 잡았다. 여성 30명쯤 규합해 여성 의병대를 조직하고 남자 의병 600명과 함께 군사훈련을 했다. 창을 찌르는 훈련을 하고 사격 훈련도 했다. 놋쇠를 녹여 탄환을 만들었고 화약을 만들기 위해 유황이 부족하자 소변을 끓여 가며 작업을 계속했다.
하지만 일제의 우세한 화력에 의병은 패했다. 하지만 만주로 망명해 독립운동을 계속하기로 하고 식솔 40명과 함께 윤희순은 중국 요녕성으로 거쳐를 옮겼다. 만주로 가기 전 일본 경찰과 앞잡이들이 생가에 들이닥쳐 시아버지의 행방을 추궁했다.
시아버지는 앞서 만주로 떠난 상태. 일제는 어린 아들 유돈상을 때리며 자백을 요구했다. 하지만 윤희순은 “자식을 죽이고 내가 죽을지언정 큰 일 하시는 시아버지를 죽도록 알려줄 줄 아느냐”며 흔들리지 않았다. 결국 일본 경찰은 그냥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만주에서 윤희순은 중국인들에게 쌀농사 기술을 전수하고 노학당이라는 학교도 설립해 교육사업을 펼쳤다. 1915년엔 조선독립단을 만드는 데 중심인물이 됐다. 윤희순과 아들 유돈상은 항일선전을 강화해 중국인들을 각성시켜 연합투쟁을 하는 것이 급선무라고 생각하고 조선독립단을 한중 연합으로 조직했다.
낮에는 농사일을 하고 밤에는 북산 마을 뒷산에 올라가 군사훈련을 했다. 윤희순은 아들 세 명을 모두 항일 투쟁의 일선으로 보내고 자신은 후방을 지원했다. 추적해온 일본 경찰이 마을에 불을 내 독립운동을 막았고 윤희순은 좌절한다. 그리고 ‘신세타령’이라는 노래를 만들었다.
“슬프고도 슬프다. 이내신세 슬프도다. 이국만리 이내신세 슬프고도 슬프도다/…/ 우리조선 어디가고 왜놈들이 득실하나/…/ 이 내몸이 어이할고 어디간 들 반겨줄까. 어디간 들 반겨줄까.”

▶춘천 의암공원에는 윤희순 동상과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를 상징하는 평화의 소녀상이 함께 있다.

▶춘천시 남면 가정리에 있는 윤희순 묘소
망명 생활의 고단함과 외로움이 그대로 묻어난다.
이제 생가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윤희순 묘소로 가보자. 시아버지와 남편의 묘소가 양쪽에 있다. 윤희순 묘소는 생가 마을을 내려다보는 춘천시 남면 가정리 산 기슭에 자리 잡고 있다. 윤희순은 아들 유돈상이 일제에 체포돼 모진 고문을 받고 숨지자 11일 만에 파란만장한 삶을 마감했다. 사후 60년 만인 1994년 중국에서 춘천으로 이장됐다.

이길우_ <한겨레신문> 창간 작업에 참여해 34년간 취재기자로 활동했다. 한민족과 이 땅의 아름다움과 의미를 찾는 작업을 계속하고 있다. 한민족의 무예, 공예, 민간신앙 등을 글과 사진을 통해 꾸준히 발굴·소개한다. 저서로 <고수들은 건강하다>, 사진집 <신과 영혼의 몸짓 아첼레란도>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