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라산 기슭 중산간 지역의 돌투성이 황무지에 인공으로 조성된 탐나라공화국은 호수와 숲, 산이 어울리며 상상의 나라로 탄생했다.
탐나라공화국에 들어갈 때는 가상의 여권과 비자를 받아야 한다. 입장료 1만 원을 내면 현장에서 여권과 비자를 만들어준다.
과연 남이섬처럼 탐나라공화국이 제주의 새로운 관광 명소가 될 수 있을까?
백기가 나부낀다. 아무런 무늬가 없는 깨끗한 흰 천으로 만든 여덟 개의 백기가 제주도의 거센 바람을 맞으며 휘날린다. 평생 누군가에게 져 본 일이 없는 그지만 이번엔 아무 조건 없이 손을 들었다. 항복했다. 그가 항복한 대상은 하늘이다. 하늘과는 싸울 수도 없고 싸우더라도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고개를 숙였다. 8년 전 제주로 내려와 마주한 제주 중산간의 자연은 황량했다. 남이섬을 최고의 관광지로 만든 이력이 있었지만 남이섬엔 강이 있었고 무성한 숲이 있었다. 하지만 제주는 달랐다. 비는 많으나 물은 없다. 돌은 많으나 흙은 적다. 바람은 많고 그늘은 없다. 그의 마음엔 한 가지 목표가 있었다. “제주 사람이 모르는 제주를 찾겠다.”
지난 8년간 강우현(68) 탐나라상상그룹 대표는 3만 평의 돌산을 숲이 우거진 공원으로 만들었다. 그의 행동 신조는 분명했다. 나무가 없으면 심고 물이 없으면 빗물을 모아 쓰고 돌이 많으면 돌을 많이 쓰고 흙이 부족하면 흙을 적게 쓴다. 남들은 황무지라고 외면했지만 그는 황무지가 좋았다. 이유는 간단하다. “아무것도 없으니 아무것이나 해도 됐어요.” 기막힌 발상의 전환이다.

▶탐나라공화국 입구 연못에 깨진 도자기 등으로 표현한 제주도가 보인다.

▶노자예술관을 가득 채운 노자 관련 서적
3만 평 돌산을 숲이 우거진 공원으로
강공이산(康公移山)이 아닌 강공조산(康公造山)이다. 그의 첫 번째 공화국은 남이섬의 나미나라공화국이었고 이번에 만든 두 번째 공화국은 탐나라공화국이다. 4월 30일 일반인에게 개방을 시작했다. 남이섬에 들어갈 때처럼 탐나라공화국에 들어갈 때도 가상의 여권과 비자를 받아야 한다. 당일 비
자는 1만원, 1년짜리 여권은 2만원이며 현장에서 여권과 비자를 만들어준다. ‘과연 남이섬처럼 탐나라공화국이 제주의 새로운 관광 명소가 될 수 있을까? 강우현식 상상력은 또 어떻게 발휘됐을까?’ 하는 궁금증에 주저 없이 6월 8일 탐나라공화국에 입국했다. 위치는 제주시 한림읍 금악리.
우선 나무가 많다. 8년 전 이곳이 나무 하나 없는 돌산이었다는 것을 믿을 수 없을 만큼 무성하다. 무려 5만 그루를 새로 심었다. 대부분 공짜로 나무를 구해 심었다. 나무가 필요하다고 소문을 내니 주변 지역 주민들이 자신의 산에 있는 나무를 캐 가라고 찾아왔다. 경남 하동군은 차나무 1만 5000주를, 한화그룹은 소나무 2400주를, 공무원연금공단은 편백나무 100주를 기부했다.
연못도 약 80개 만들었다. 바위를 깨고 바닥에 비닐을 깔고 빗물을 담았다. 연못 가운데 가장 큰 연못인 인당수는 300평이 될 만큼 크다. 깊이도 1.5m나 된다. 폭포도 만들었다. 땅의 깊이를 알기 위해 파다가 생긴 절벽에 물을 흐르게 하고 이름도 ‘나이야~가라 폭포’ (‘나이를 먹지 않는 폭포’란 뜻)로 지었다.
애초 1.5km 떨어진 마을에서 필요한 물을 끌어오려고 했으나 15억 원이나 든다고 해 빗물을 받아 활용했다. 빗물을 지하에 깊숙이 저장한 후 전기 장치를 통해 거르고 돌려서 식수부터 연못 물까지 해결했다. 서울대학교 빗물연구센터의 도움을 받았다. 그리고 들꽃의 씨앗을 뿌리고 새싹을 심었다. 시간이 흐르니 멋진 정원이 됐다. 돌산과 호수와 나무와 꽃이 자연스럽게 조화를 이뤘다. 거대한 인공 정원을 만든 것이다.

▶탐나라공화국 곳곳에 강우현 대표가 만든 조형물이 눈길을 끈다.
제주에 스며들며 노자에 푹 빠져
탐나라공화국에는 노자(老子)예술관과 노자 서원이 있다. 예술관엔 노자 관련 서적이 빽빽이 서가를 채우고 있다. 백기 여덟 개가 휘날리는 장소도 노자예술관 지붕이다. 제주에 웬 노자?
강 대표는 노자 <도덕경>도 제대로 읽지 않았다. 하지만 제주에 스며들면서 노자에 빠졌다. “없는 것에서 생겨나고 그것을 연결하니 길이 생겼다”는 ‘무(無)와 유(有)를 연결하면 길(道)이다’라는 노자의 가르침이 가슴에 다가왔다. 그는 바로 노자의 고향으로 알려진 중국 허난성 뤄양사범대학의 양중유 노자연구원장을 찾아갔다. 강 대표의 방문 목적을 들은 양 원장은 “노자 <도덕경> 5000자를 다 외우는 학자들도 한 글자를 실제 생활에 작용해 써먹지 못하는데 노자를 잘 모르는 강 선생은 세 글자나 쓰고 있다”며 감탄했다. 그리고 노자 관련 서적 500권과 낙양의 돌멩이 등 컨테이너 한 개 분량의 자료를 건넸다.
노자예술관에서는 2년 전 한중 국제노자학술대회가 열렸다. 강 대표가 직접 기획하고 진행했다. 학술대회엔 노자 <도덕경>의 ‘상선약수(上善若水·최고의 선(善)은 물과 같다)’를 주제로 강 대표가 쓴 논문도 발표됐다. 논문을 받아 본 참가자들은 경악했다. 난생 처음 본 논문이었다. 그 논문은 백지였다. 하지만 강 대표의 설명 한마디에 모두 웃을 수밖에 없었다. “무소유를 말한 노자에 대해 뭘 더 말할 게 있겠습니까?”
강우현식 상상력은 식사 메뉴에도 발휘됐다. 고기나 생선은 찾아볼 수 없었고 나물과 옥수수, 감자 등 채소와 죽으로만 이뤄졌다. “2500년 전 노자가 먹었던 음식을 먹는 것입니다.” 참가자들은 건강식이 좋다며 흡족해했다고 한다. 식사 준비에 들어간 비용은 모두 10만 원 정도. 다들 “이런 건강식을 어떻게 준비했냐”며 좋아했다.
강 대표의 노자 접근 방식은 문자나 글이 아니다. “노자처럼 생각하고 노자처럼 먹고자고 노자처럼 살다보면 노자처럼 된다.”
버려진 물건 재사용해 예술 작품으로
공원 한쪽에선 도서관 확장 공사 중이다. 무려 30만 권이 보관돼 있다. 일반 도서관처럼 책을 빌려주기 위한 도서관이 아니다. 전국에서 보내준 중고서적들이다. 책의 무덤을 만들고 있다. 여기에도 강 대표식 상상력이 적용된다.
“앞으로는 종이 책이 사라질 것입니다. 아마도 수십만 권이 보관되는 장소는 찾아보기 힘들 것입니다. 책골당을 만드는 것입니다. 위폐에는 무덤에 들어갈 저자의 이름이 새겨집니다. 후손들에겐 아주 가치 있고 희귀한 물건을 볼 수 있는 박물관이 될 것입니다.”
공원 곳곳에는 버려진 물건을 재활용한 장소가 많다. 버려진 철근으로는 의자를 만들었고 버려진 볼링공, 버려진 당구대, 버려진 돼지 여물통, 버려진 풍력발전기 날개 등이 멋진 장식품으로 재탄생했다. 소주병을 녹여 벽면의 예술 작품으로 썼고 녹슨 쇠판도 색종이처럼 오려 아름다운 작품이 됐다.
“쓰던 물건을 안으로 버리면 써버리는 것이고 밖으로 버리면 내버리는 것입니다. 내버리면 청소이고 써버리면 창조입니다. 쓰레기는 쓸 ‘애기’입니다.” 이렇게 말하는 강 대표에겐 세상 모든 것이 상상과 창조의 대상이다.
공원 곳곳엔 강 대표의 그림과 글이 돌에 새겨 있다. “돌에 새기면 영원히 남습니다. 그것이 문화이고 유적입니다.”

▶강우현 대표가 돌에 새긴 글씨

▶강우현 대표
“가상현실 적용한 놀라운 세계 펼쳐질 것”
8년째 가족과 떨어져 혼자 살며 공원을 만든 강 대표는 공원 한쪽에 자신의 출정기를 돌에 비문으로 새겨 놓았다.
“하늘 땅 그대들과 숨바꼭질 장난끼/ 하하호호 춤노래에 여기 우리들 두 눈에 총기담아 말랑말랑 손끝 정성/ 세상에 다시 새로내 전하는 오늘입니다/…/ 골바람 휘몰아치고 파도야 일어나라/ 비바람 땡볕으로 상상의 즐거움 발걸음 머뭇거리지 않게 해주시고/ 돌부리에도 생명의 싹 틔워주시고/ 구멍구멍 현무암에는 속살 채워주시고/…/ 초롱초롱 별빛들 휘영청 달님아/ 석양의 옷자락 여기 머물때 이땅에서 영원한 안식을 꿈꾸시라. 섬나라 상상의 나그네/ …”
앞으로 계획은? 강 대표의 눈빛이 다시 반짝인다. “탐나라공화국을 팔 것입니다.” “네? 팔다뇨?” “탐나라공화국의 땅이 아니라 탐나라공화국의 하늘과 지하세계를 팝니다.”
이른바 가상현실인 메타버스 개념을 적용한 것이다. 구체적인 내용은? “하하하. 기다려 보세요. 놀라운 세계가 펼쳐질 것입니다.”

이길우_ <한겨레신문> 창간 작업에 참여해 34년간 취재기자로 활동했다. 한민족과 이 땅의 아름다움과 의미를 찾는 작업을 계속하고 있다. 한민족의 무예, 공예, 민간신앙 등을 글과 사진을 통해 꾸준히 발굴·소개한다. 저서로 <고수들은 건강하다>, 사진집 <신과 영혼의 몸짓 아첼레란도>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