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알뜨르 비행장의 비행기 격납고. 당시 일본 전투기인 제로센을 실물 크기로 만든 철근 비행기 조형물에는 치욕의 역사를 기억하자는 의미의 리본이 휘날리고 있다.
광복절을 앞두고 제주도를 찾으면 일제가 남긴 우리 역사의 아픈 흔적을 찾아가보자. 이른바 다크투어다. 아름다운 자연을 품은 제주의 근현대사는 고통으로 점철됐다.
시멘트 골조만 남아 있다. 언뜻 보면 2층 건물을 짓다가 만 듯하다. 난간이 사라진 계단을 아슬아슬 중심을 잡으며 올라간다. 태평양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몸이 심하게 흔들린다. 바람이 거세다. 올라서니 텅 빈 공간이다. 멀리 제주 남쪽 바다가 아스라이 보인다. 일제강점기 일본군이 만든 비행장의 사령탑 역할을 했던 관제탑이다. 세월이 흘러 복잡했던 관제탑 시설은 모두 사라졌다. 활주로가 있던 벌판에는 각종 작물이 자라는 밭이 있다. 비행장과 바다 사이에 산방산이 우뚝 솟아 있다.
과거로 돌아간다. 지금부터 84년 전, 중일전쟁 시기다. 이 관제탑에서 출격 신호를 받은 일본 전투기가 힘차게 프로펠러를 돌린다. 전날 일본 본토의 나가사키현의 오무라 항공기지에서 날아온 비행기들이다. 목표지는 중국 난징. 일본 공군은 난징을 쑥대밭으로 만든 공습의 중간 기착지로 이 비행장을 사용했다. 덕분에 일제의 난징 공습은 성공했다.
활주로와 비행장 건설에 동원된 사람들은 당시 제주도민들이다. 벌판에 비행장을 만드는 강제노역에 동원됐다. 크고 작은 밭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던 이곳의 돌담을 허물고 땅을 메워 비행장을 만들었다. 마을 주민은 살던 집터를 잃고 강제 이주를 당하고 노역에 동원돼 일해야만 했다. 당시 흘린 우리 선조들의 피와 땀이 알알이 전해진다.

▶섯알오름에 있는 일제 고사포 진지
일제 만행 기억하는 알뜨르 비행장
광복절을 앞두고 제주도를 찾으면 일제가 남긴 우리 역사의 아픈 흔적을 찾아가보자. 이른바 다크투어다. 아름다운 자연을 품은 제주의 근현대사는 고통으로 점철됐다. 중일전쟁 시기 일제는 제주도를 대중국 폭격기지로 활용했고, 태평양전쟁 말기에는 일본 본토를 지키기 위한 최후 거점지로 삼았다. 해방 이후 일어난 한국 근현대사 최대의 비극 가운데 하나인 제주4·3사건 때는 많은 제주도민이 희생됐다.
먼저 알뜨르 비행장으로 가보자. 제주 서귀포시 대정읍 상모리에 자리 잡은 알뜨르 비행장은 이름만으로는 프랑스 남쪽 지방의 낭만적인 지역 이름을 딴 것 같지만 순수 제주 방언이다. ‘아래쪽’을 뜻하는 제주어 ‘알’과 ‘넓은 들판’을 뜻하는 제주어 ‘드르’가 합쳐진 말이다. 제주도 아래쪽에 있는 넓은 들판이라는 뜻이다.
알뜨르 비행장에서 가장 먼저 찾는 곳은 격납고다. 전투기 한 대가 들어갈 정도의 크기로 열아홉 개가 남아 있다. 긴 세월이 지났으나 시멘트로 견고하게 만들어져 원래 모습 그대로 다. 한 격납고엔 철근으로 당시 일본 전투기 제로센을 실물 크기로 재현한 작품이 있다. 철근 비행기 날개와 몸체엔 일제의 만행을 잊지 말자는 뜻으로 방문자들이 묶어 놓은 리본이 빼곡하다. 한쪽엔 조그만 향로도 놓여 있다. 철근은 녹슬었지만 역사의 교훈은 단단해져야 한다.
격납고 안으로 들어갔다. 녹슨 철근 사이로 빛바랜 노란 리본이 흩날리고 파란 하늘이 투영됐다. 마음이 무거워진다. 이곳에 가미가제특공대의 전투기도 있었다.
비행장 입구를 따라 약 100m 들어가면 왼쪽에 지하 벙커가 있다. 비행대 지휘소나 통신시설을 장치한 곳으로 추정된다. 너비 28m, 길이 35m 규모의 반지하로 만들어진 콘크리트 구조물인 이 벙커도 원형 그대로 유지됐다.

▶알뜨르 비행장에서 바라본 남쪽 바다 방향 풍경. 산방산이 우뚝 솟아 있다.
송악산 바닷가 동굴 진지
다시 과거로 돌아가자. 태평양전쟁 끝 무렵인 1945년 제주도는 거대한 요새로 변했다. 전세가 불리하게 돌아가며 패전을 예상한 일본군은 ‘일본 본토’를 방어하기 위해 ‘결(決) 7호 작전’에 돌입했다. 제주도를 방어기지로 삼고 최후의 결사항전을 벌였다. 1945년 8월 기준 인구 약 25만 명의 제주도에 무려 약 6만 7000명의 일본군이 주둔했다.
일제는 제주도민들을 군사시설 구축에 동원했다. 초등학교를 졸업할 나이가 되면 마을별로 인원을 할당해 군사시설 구축에 내몰았다. 주민들은 격납고나 갱도 진지를 건설하다가 중상을 입기도 했다. 바다에서 자갈을 옮기고 망치로 돌담을 잘게 부순 뒤 갖고 가서 격납고를 만들고 흙을 덮어서 풀을 심고 위장했다. 중장비가 없어 삽과 곡괭이로만 비행장 공사를 했다. 당시 제주도에서 결 7호 작전을 위해 일본군은 방어진지 104곳, 비행장 4곳, 해군용 특공기지 5곳 등을 구축했다.
이제 비행장 근처 섯알오름 중턱에 있는 일제 고사포진지로 가보자. 제주올레 10길 표시를 따라 15분 정도 산길을 걷다보면 고사포 진지가 나온다. 당시 고사포는 흔적도 없고 둥글게 파놓은 원형 모양의 진지와 진지 안에서 바다 쪽을 바라볼 수 있는 진지 창문이 그대로 남았다. 일본군은 이 고사포로 미국의 B-29 폭격기 공습에 대비했다. 비록 고사포는 없으나 일제의 마지막 발악과 함께 이곳에 진지를 구축하기 위해 동원됐던 제주도민의 거친 숨결이 그대로 느껴진다.
송악산을 지나 해안가로 나오면 바닷가에 동굴 진지가 보인다. 거친 파도가 힘을 다해 기진맥진할 거리에 시커먼 바위 동굴이 바다를 향해 입을 벌리고 있다. 일본군이 해상으로 들어오는 연합군 함대를 공격하기 위해 동굴 진지를 구축했다. 연합군 함대를 향해 소형 선박을 이용한 자살 폭파 공격도 준비했다고 한다. 단단한 해안 바위에 만들어진 동굴이 13곳이나 된다. 송악산은 곶처럼 돌출된 지역으로 제주 서쪽과 남쪽을 조망하기 좋은 최적의 장소다. 또 연합군 상륙작전의 가장 유력한 예상 지역이었다. 일본 본토를 방어하는 최전방인 셈이었다. 이 해안가 지하에는 전투사령실과 탄약고, 연료 저장고, 어뢰 저장고 등 주요 군사시설을 감출 목적으로 높이 3m, 너비 4m에 길이 1220m에 이르는 갱도 진지가 있다. 송악산 해안 마라도행 선착장 남동쪽에는 열아홉 개의 어뢰정 진지도 남아 있다.

▶알뜨르 비행장의 관제탑.시멘트 골조만 남아 있다.

▶송악산 기슭 해안가에 일제가 설치한 해안 동굴 진지
제주4·3사건의 흔적도 남아
알뜨르 비행장 근처엔 제주 근대사의 가장 아픈 상처인 제주4·3사건의 흔적도 남아 있다. 민간인 학살 터다. 학살 장소가 그대로 보존돼 있다. 1950년 섯알오름 자락으로 끌려온 예비검속자들은 일제강점기 화약 창고였던 곳에서 억울한 죽음을 당했다. 예비 검속은 블랙리스트처럼 사상이 의심스러운 사람의 목록을 작성하고, 전쟁이 발발하면 이 사람들을 일제히 잡아들이는 것이다. 전세가 악화되면 즉결 처형했다.
미 군정이 들어와 무장해제시키며 폭파시킨 후 움푹 팬 지형이 된 곳이 예비검속자들의 사형집행 장소가 됐다. 유가족에겐 당시 시신 수습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6년이 지난 1956년에야 뼈를 수습해 묘지를 만들었다.
세월이 많이 흐른 탓에 희생자들의 시신을 분간할 수 없었다. 뼈를 맞추고 묻은 후 한날한시 한마음으로 제사를 올려 한 자손이 되는 것과 같다는 의미로 ‘백조일손지지(百祖一孫之地)’라는 묘비를 세웠다. 깊은 역사의 상흔이다. 학살 터를 내려다보고 있노라면 당시 학살당한 제주도민들의 비명이 그대로 들리는 듯하다.
내친김에 제주의 고려 항몽 유적지도 찾아가보자. 알뜨르 비행장에서 제주시로 가는 길, 애월읍에 있다. 항파두리성이다. 항파두리성은 1273년(고려 원종 14년) 인천시 강화도와 전라남도 진도에서 항전하다 제주도로 쫓긴 삼별초가 약 1만 2000명의 여몽 연합군에 맞섰던 대몽항쟁종착지다. 삼별초의 처절한 대몽 투쟁의 역사 흔적이 생생하다. 발굴 작업으로 철제 갑옷 파편과 청동 촉, 청동 바늘, 철제 솥, 청백자 등 각종 유물이 빛을 보았다.

이길우_ <한겨레신문> 창간 작업에 참여해 34년간 취재기자로 활동했다. 한민족과 이 땅의 아름다움과 의미를 찾는 작업을 계속하고 있다. 한민족의 무예, 공예, 민간신앙 등을 글과 사진을 통해 꾸준히 발굴·소개한다. 저서로 <고수들은 건강하다>, 사진집 <신과 영혼의 몸짓 아첼레란도>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