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드나무는 우리 고전에 자주 등장하는 나무다. 주로 여인이 이별할 때 건네는 사랑의 징표로 나온다. 조선 기생 홍랑이 최경창을 떠나 보내며 쓴 시조 “묏버들 가려 꺾어 보내노라 님의 손에 / 자시는 창 밖에 심어 두고 보소서 / 밤비에 새 잎 곧 나거든 나인가도 여기소서”가 대표적이다.
구효서의 단편 <소금가마니>에는 버드나무의 한 종류인 용버들이 가장 인상적인 장면, 강인한 모성애를 보여주는 장면에 나온다.
소설은 두부를 만들어 자식들을 먹여 살린 어머니를 회상하는 내용이다. 주인공은 무학자인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나서야 우연히 어머니가 처녀 시절 키에르케고르의 책을, 그것도 일어판으로 읽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어머니가 일본어 철학서까지 읽은 것은 결혼 전에 사모하고 교감한 지식인 청년 박성현이 있었기 때문이다.
결혼 즈음 이 같은 사실을 안 아버지는 어머니에게 끔찍한 폭력을 가하지만 어머니는 묵묵히 참아내며 두부로 아버지와 자식들을 먹여살린다. 어머니를 위기에 처하게 한 것도, 그 위기에서 구해 준 것도 두부였다. 6·25전쟁 때 어머니는 인민군의 요구에 따라 두부를 만들어낸다. 그러나 국군이 다시 밀고 올라왔을 때 어머니는 이때문에 부역혐의를 받아 처형 위기에 몰린다. 이때 애국청년단장인 박성현은 국군을 위해 두부를 만들어 내라는 조건으로 어머니를 풀어준다.
그 후 아버지의 폭력은 더 심해졌다. 몇 시간씩 이어지는 아버지의 구타는 “문밖의 자식들을 숨막히게 했다.” 어머니는 부엌 뒤쪽 어둡고 습기찬 헛간에서 오랜 시간을 보냈고, 거기에는 늘 간수를 내기 위한 소금가마니 세 개가 삼존불처럼 놓여 있었다. 간수는 어머니의 눈물 같았다.
그런 어머니였지만 둘째 누이가 나무에서 떨어져 죽었을 때는 딴사람 같았다. 가망 없다는 아버지와 동네 사람들에게 쌍욕을 퍼부으며 아이를 들쳐업고 읍내로 향한 것이다. 그러나 읍내로 가려면 용내천을 건너야 했는데 장마로 잠긴 지 오래였다. 어머니는 그날 밤 돌아오지 않았다.
그날(다음날 새벽) 마을 사람들과 아버지는 용내천을 가로질러 쓰러져 있는 커다란 용수버드나무를 발견했다. 금방 잘린 듯한 나무 밑둥에는 손잡이에 핏물이 밴 톱 한 자루가 버려져 있었다. 그날을 회상할 때마다 어머니는 깊이 파인 손바닥의 상처를 들여다보곤 했다.
어머니가 용수버드나무를 이용해 용내천을 건너 읍내로 내달릴 때 아이는 소생했다. 미친 듯 달린 어머니의 몸이 아이의 횡격막을 자극한 것이다.
간수를 얻기 위해 어둠과 습기를 빨아들인 소금가마니처럼 어머니는 어둠과 습기를 기꺼이 받아들여 자식들을 사랑으로 지켜온 것이다.
아버지와 박성현은 전쟁이 끝난 후 각각 허망하게 죽지만 어머니는 아흔일곱까지 천수를 누렸고, 어머니의 상여에는 서른 명의 자손들이 따랐다.
이 소설에 나오는 용수버드나무는 용버들을 가리키는 것 같다. 나무도감을 찾아보고 전문가들에게 문의해 보아도 용수버드나무라는 나무는 없었다. 용버들이 맞다면 어머니는 용이 올라가는 것처럼 구불구불한 나무를 타고 넘어갔을 것이다. 버드나무의 일종인 용버들은 가지와 잎이 구불거리는 것이 특징이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파마한 버들’이다. 작은 가지는 밑으로 처지고 역시 꾸불꾸불하다. 공예품 재료나 꽃꽂이 소재로 사용하며 호수나 하천변 등의 습지라면 전국 어디에서나 볼 수 있다. 주말에 찾은 경기 의왕 백운호수 주변 곳곳에도 구불구불 자라는 용버들이 많았다.
글과 사진·김민철(조선일보 기자·<문학 속에 핀 꽃들> 저자) 2014.0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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