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관계 화해 무드로 한반도에서는 평화와 번영이라는 새로운 역사가 시작되고 있다. 일반 시민은 그 차이를 체감할 수 없지만, DMZ 서부전선 민간인통제구역(이하 민통선) 안에 자리 잡은 통일촌 주민들은 변화의 시작을 일상에서 실감하고 있다. 분단의 끝과 통일의 출발점이라는 지리적 특성 탓에 남북관계가 주민들의 일상에도 큰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이다. 평화는 마을 인근의 대북확성기 철거를 시작하면서 변화의 조짐을 보였다. ‘판문점 선언’의 후속 조치로 대북확성기가 철거되었고, ‘4·27 남북정상회담’ 이틀 전부터 북한의 대남방송도 중단되었다. 주민들을 괴롭혔던 각종 소음 문제가 40여 년 만에 비로소 해결된 것이다. 통일촌 이완배(65) 이장은 “밤낮없이 울리는 확성기 소리 때문에 여름에도 문을 열어놓을 수 없을 정도였는데 이제는 편안히 발 뻗고 잘 수 있게 되었다”고 말했다. 부녀회 식당에서 만난 김용분(70) 씨도 “당장 통일이 어렵더라도 지금처럼 평화롭게 지내면서 남북한 주민이 자유롭게 오갈 수 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곳에 거주하는 주민들은 군부대의 통제 아래 적잖은 불편을 감수하며 살아왔다. 최근 변화하는 남북관계를 바라보며 마을 주민들은 새로운 희망을 기대한다. 물론 평화 분위기 속에서도 ‘비상대피소’와 ‘지뢰지대’ 철조망은 여전히 마을 한편에 자리하고 있다. 전쟁의 두려움과 평화의 기대가 공존하는 통일촌 마을에서 감지된 변화들을 살펴보았다.
▶ 통일대교 길목에 설치된 철조망이 분단의 현실을 일깨운다.
반목과 냉전의 시대에서 태어난 통일촌
경기 파주시 군내면 백연리. 군사분계선 남방 4.5km 지점에 위치한 ‘통일촌’으로 향하는 길은 긴장의 연속이다. 마을로 들어서는 길목인 통일대교부터 군의 삼엄한 경비가 펼쳐진다. 이곳을 통과하기 위해서는 땅을 소유한 영농인이나 실거주자와 함께하거나 연계된 관광 상품을 이용해야 한다. 군사보안지역이기 때문에 지도에도 표시되지 않는 마을이다. 파주에는 통일촌 외에 대성동 마을(조산리)와 해마루촌(동파리) 등 세 개 마을이 군사접경지역에 있다. 통일촌은 다닐 수 있는 길 외에는 모두 철조망으로 막혀 있다. 지뢰가 남아 있을 가능성 때문이다. 이곳은 지뢰 사고로 주민들이 죽거나 다치는 일이 예사로 일어나고, 장마철에 북에서 떠내려온 목함지뢰 때문에 군에서도 사상자가 발생하기도 한다. 작년 6월에도 지뢰로 추정되는 폭발물이 터져 개간 작업을 하던 포크레인이 전도되는 사고가 일어났다. 통일촌에 오면 휴전상태의 분단국가라는 것이 피부에 와 닿는다.
1973년 8월에 건립된 통일촌은 이스라엘 키부츠를 본떠 낮에는 일하고 유사시에는 전투에 참가하는 것을 목표로 만든 전략촌이다. 제대 군인 40세대와 지역 원주민 40세대로 시작되어 현재는 140세대, 480여 명이 거주하고 있다. 분단으로 떠나 있던 사람들이 다시 모여 지뢰와 철조망으로 둘러싼 DMZ 인근에서 고향의 역사를 이어가는 셈이다. 이제는 세월이 많이 흘러 초기에 입주한 1세대 대부분이 사망하고, 2세대가 주축을 이루어 살고 있다. 입주 때부터 살아온 이완배 이장은 “그때는 주민들이 돌아가면서 경계 근무를 서고, 마을회관에서 사이렌만 울리면 일하다 말고 뛰어와서 총 받아가지고 마을 초소에서 근무를 서고 그랬죠”라고 당시를 회상한다. 김용분 씨도 “여자들도 총 쏘는 훈련을 받았어요. 남자들은 한 달에 한 번, 여자들은 1년에 두 번씩 사격 훈련을 받았죠. 밤에 포 소리가 말도 못하게 많이 들렸어요. 창문이 덜덜덜 떨릴 정도였으니까”라고 말했다.
통일촌은 북한 개성과의 거리가 20km가 채 되지 않아서 날씨가 맑은 날에는 북측 마을 철탑에 설치된 인공기와 북한 주민의 움직임이 선명하게 보인다. 청명한 날이면 개성 송악산까지 훤히 내다보일 정도다. 화해 무드로 가고 있다고 하지만 가까이에서 ‘도끼 만행 사건’부터 ‘연평도 포격’, ‘목함지뢰 도발’ 등 남북의 우여곡절을 겪어온 주민들은 긴장을 쉽게 내려놓을 수가 없다. 주민 임 모 씨는 “연평도 포격 때 며칠 동안 마을 대피소에서 지내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며 불안하고 걱정스런 마음을 토로했다. 통일촌 지하 대피소에는 폭격에도 안전할 수 있도록 20cm 두께가 넘는 출입문과 비상 발전기, 급수시설, 방송청취시설 등이 완비되어 마을 사람들 누구나 비밀번호만 입력하면 들어갈 수 있다.
통제와 규제에 둘러싸인 민통선 사람들
민통선 안에 거주하는 사람들은 외부로 나가거나 들어오기 위해서 입구에 설치된 초소에서 신분조회 절차를 거쳐야 한다. 농사를 짓기 위해 마을 밖으로 이동하더라도 도로 중간 중간에 설치된 군 초소에서 별도로 신분조회 및 방문 목적 등을 설명해야 한다. 통일촌 안에는 군내초등학교가 있지만, 인근 문산읍으로 등교하는 중·고등학생은 등하교시에도 신분조회 절차를 받아야 한다. 통일촌 노인정의 어른들은 “옛날에는 일주일 전에 (예통을) 해야 들어올 수 있었어”, “그때는 사위도 못 들어왔어. 초상이 났는데도…”라고 규제 속에 살아온 세월을 풀어놓았다. 출입이 원활하지 않아 농사에도 타격이 있다. 주민들의 90% 이상이 농사를 짓고 사는데, 농업 특성상 인력을 밖에서 조달해야 하는 경우가 많다. 일손이 턱없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한데 출입 절차에만 한 시간씩 소요되곤 했다.
“개성공단이 운영될 때는 한 시간도 넘게 걸렸어. 농사도 때가 있는데 만날 출퇴근 시간에 그렇게 걸리니 죽을 맛이었지.” (주민 박 모 씨)
▶ 1 80세대로 시작한 통일촌은 유입인구가 적어 주민 대부분이 고령화되었다.
2 개간 중에 발견된 포탄들. 당시 주민들은 포탄 밑동을 잘라 재떨이로 사용하기도 했다. ⓒC영상미디어
여기에 연평도 포격, 천안함 폭침 사건 등 남북관계를 얼어붙게 하는 이슈가 터질 때마다 주민들은 모든 것을 남겨두고 마을 밖으로 대피해야 한다. 물론 남북정상회담이나 판문점 회담과 같은 호재에도 주민들의 발은 묶인다. 인삼 농사를 짓는 주민 최 모 씨는 삼밭을 갈다가 탄약과 박격포 폭탄을 무더기로 발견해 농사에 막대한 피해를 입기도 했다.
“쟁기에 뭐가 턱 걸려서 파보니까 박격포 폭탄이랑 탄통이 상자째 있더라고…. 결국 군에서 왔는데 일주일 정도 밭에 못 들어가게 하는 거야. (인삼) 씨를 심고 지붕을 안 씌우면 삼이 마르거든. 그해 농사 망쳤지 뭐.”(주민 최 모 씨)
주민들은 오랜 세월 통제와 규제로 육지의 섬처럼 살아왔다. 주민 한 모 씨는 “여기는 없는 게 많아. 학교도 없고, 병원도 없어. 그래도 예전에는 독사에 물리면 군 의무실로 달려갔지. 거기 혈청이 있었거든. 근데 요샌 그것도 없어서 민통선 넘어 문산까지 나가야 해”라고 말했다.
평화의 바람을 타고 접경지역 땅값도 들썩이고 있다. 이완배 이장은 매매가 원활하지는 않지만 토지 가격이 두 배 이상 오른 것이 사실이라고 말했다. 주민들은 개발 바람 때문에 수십여 년 지켜온 삶의 터전을 빼앗길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시달리고 있다. 오랜 세월 척박한 땅을 일구며 어렵게 정착했지만, 토지 소유권 문제로 한 차례 홍역을 겪었기 때문이다. 1982년부터 1993년까지 시행된 ‘수복지역 소유자 미복구 토지의 복구 등록과 보전등기에 관한 특별법’으로 원소유자와 개척자 사이에서 갈등을 겪은 적이 있었다. 인삼 밭을 개간한 최 모 씨는 “아버지가 같은 땅을 세 번 산 적도 있다”며 분통을 터트렸다. 소유권자에게 반환된 토지를 다시 매입하느라 빚을 낸 사람도 있고, 여건이 되지 않은 사람은 임대나 소작 형식으로 경작을 하고 있는 상태다. 이완배 이장은 “민통선 인근 개발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오지만, 전쟁 불안 없이 평생을 지켜온 마을을 일구며 사는 것이 주민들의 소망”이라고 말했다.
평화와 번영, 장밋빛 미래를 꿈꾸다
평화 무드로 들어가면서 통일촌 내 식당과 농산물 직판장은 활기를 띠고 있다. 그동안 접경지역이라는 특수성 때문에 각종 제재를 받아왔지만 남북 간의 교류가 시작되며 함께 주목 받는 것이다. 통일촌에서는 지역 특산물인 ‘장단콩’을 활용해 마을공동체에서 ‘통일촌장단콩식당’과 특산물 판매소 등을 운영해 창출된 수익을 공동으로 분배하고 있다. 최근 4·27 남북정상회담 이후 평화 분위기를 타고 민통선 인근 안보관광객이 늘어나면서 이곳 매출도 70%가량 급증한 것으로 알려졌다. 통일촌마을구판장을 운영하는 노병선(61) 씨는 “긴장 상태에는 위험지역으로 인식되어 찾는 사람이 거의 없는데 최근에는 개인 방문과 단체 관광객이 눈에 띄게 늘어났다”며 “마을 주민들이 노령화되어 활력을 잃어가고 있는데, 평화와 함께 통일촌 마을도 번영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나타냈다.
남북 화해 분위기 속에 ‘통일경제특구’ 논의가 본격화되면서 접경지역 주민들의 기대감도 높아지고 있다. ‘통일경제특구’는 군사분계선 남쪽 접경지역에 우리 기술과 자본, 장기적으로는 북한 노동력을 결합한 특구를 설치하자는 내용이 핵심이다. 개성공단이 노동집약적 경공업 위주였다면 통일경제특구는 첨단 산업을 유치한다는 면에서 차이가 있다. 오랜 시간 통제와 불편을 감수해야 했던 주민들은 조심스럽게 장밋빛 미래를 그려본다.
▶ 1 맑은 날 전망대에 서면 북한 주민의 움직임이 선명하게 보일 정도로 가까운 거리다. 2 명절마다 실향민들로 붐비는 망향제단. 3 군사보안지역으로 들어가는 입구. 이때부터 내비게이션은 먹통이 된다. ⓒC영상미디어
실향민들의 감회 역시 남다르다. 피난을 떠난 열일곱 소년에서 어느새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 된 실향민 장성동(84) 씨는 아직도 어머니를 만날 날을 그린다.
“‘가서 한두 달만 있으면 다시 복구될 거니까 조금만 참거라’ 그래서 혼자 피난을 왔는데 시간이 이렇게 흘렀네요.” (장성동)
헤어지기 전 엄마한테 받은 금반지를 배고픈 시절 팔아버려 장 씨의 아내 이연희(80) 씨가 금반지를 새로 맞춰두었다.
“이산가족 찾기 만나면 가지고 가서 끼워드리려고요. 포기할 수는 없죠. 남북이 이웃처럼 서로 오가면서 파주와 개성, 평양을 왕래하는 날이 빨리 왔으면 좋겠어요.” (이연희)
고향을 앞에 두고 떠날 수 없어 통일촌에 자리 잡았다는 실향민 주민은 “남북 정상이 손을 맞잡고 평양과 서울을 오가면 우리도 언젠가 고향에 갈 수 있겠지”라며 “하루빨리 통일이 돼 명절 때 차례도 같이 지냈으면 좋겠어. 죽어서라도 고향땅에 뼈를 묻을 수 있게 되면 더 바랄 게 없지”라는 바람을 밝혔다. 군사분계선의 최북단, 이곳에도 평화의 바람이 불고 있다. 평화의 순풍이 한반도를 뒤덮을 때 전략촌으로 만들어진 통일촌은 진정한 통일촌으로 불릴 날을 기다린다. 그날은 꼭 찾아올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