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환(오른쪽) 9단과 신진서 9단이 11월 1일 열린 삼성화재배 국제바둑대회 결승전에서 1국이 끝난 뒤 모니터를 보며 복기하고 있다.│한국기원
11월 3일 막을 내린 삼성화재배 국제바둑대회에서 우리나라 기사가 결승에서 맞붙은 것을 계기로 그동안 중국의 만리장성에 눌렸던 우리나라 바둑이 부활하는 것 아니냐는 얘기가 나온다. 실제 우리나라는 2021년 열린 국제대회에서 두꺼운 선수층을 자랑하는 중국의 포위망을 뚫은 것으로 보인다.
우리나라는 2월 초 LG배 국제기전에서 신민준 9단이 중국의 커제 9단을 꺾고 우승하면서 ‘커제 공포’에서 벗어나기 시작했고 2월 말 농심배 국가대항전에는 신진서 9단이 중국과 일본 기사를 상대로 5연승을 질주하면서 3년 만에 대회 우승컵을 되찾았다. 이 과정에서 신진서는 탕웨이싱, 양딩신, 커제 9단 등 중국의 강호를 모두 꺾었다. 최근 10년간 중국이 7번 우승한 농심배에서 우리나라 랭킹 1위 신진서가 대륙의 강풍을 저지한 것이다.
우리나라 바둑의 상승 흐름은 이어졌다. 신진서는 9월 열린 춘란배 국제대회 결승에서 중국의 탕웨이싱 9단을 제치고 정상에 올랐다. 격년 대회인 춘란배에서 2019년 박정환 9단에 이어 우리나라 기사가 2연패를 일궈낸 것이다.
가장 최근 대회인 삼성화재배에서도 박정환이 신진서를 꺾고 우승컵을 차지하면서 기세를 뽐냈다. 결승에 앞서 삼성화재배 8강에는 5명의 우리 기사가 진출해 중국(3명)을 앞섰고 4강에서는 우리나라와 중국의 기사가 두 명씩 백중세였으나 신진서와 박정환이 결승 맞대결을 펼치면서 6년간 중국이 독식하던 우승컵을 회수했다.
후발 주자 우리나라, 세계 무대 주도권
2022년 2월 열릴 LG배 결승전에서도 우리나라 기사의 우승을 기대하는 분위기다. 8강에 오른 우리 기사는 신진서, 박정환, 신민준, 변상일 9단 등 4명으로 커제 등 3명이 버티는 중국보다 많다. 올 들어 중국 기사가 차지한 세계 타이틀은 몽백합배(미위팅 우승) 하나뿐이라 세계 바둑 무대에서 우리나라가 주도권을 잡은 것처럼 보인다.
현대 바둑은 일본에 의해 체계화됐지만 1980년대 말 본격화된 한·중·일 동아시아 3국 간 국제대회에서 우리나라는 특출난 능력을 뽐냈다. 1989년 응씨배 결승에서 조훈현 9단이 중국의 녜웨이핑 9단을 꺾고 우승한 것은 가장 큰 사건이었다. 모양과 탐미적 전통을 중시하는 일본이나 바둑의 원조라고 자부하는 중국이 후발 주자인 우리나라 바둑을 더는 얕잡아볼 수 없게 된 것이다.
서봉수 9단과 유창혁 9단이 실전적 기풍과 공격바둑으로 우뚝 섰고 ‘돌부처’ 이창호 9단은 바둑에서 새로운 영역을 개척했다. ‘쎈돌’ 이세돌 9단도 기발한 착상과 타개로 강한 인상을 남겼다.
이런 판도는 최근 10여 년 사이 중국의 가파른 성장세로 역전된 게 사실이다. 중국은 풍부한 자원, 활발한 프로리그, 바둑의 대중적인 인기를 바탕으로 구리, 쿵제, 커제 9단 등 주요 기사를 배출했고 특히 2~3시간 이상의 장고 바둑에서는 속기전에 익숙해진 우리나라를 압도했다.
하지만 위기는 기회이기도 하다. 한국기원은 2010년 광저우 아시안게임을 계기로 국가대표 상비군 제도를 본격적으로 시행했고 2016년부터 목진석 9단이 국가대표팀 감독을 맡으면서 주력 선수들에게 실전 대국이나 공동 연구 기회를 제공하면서 전체적으로 프로 기사의 역량을 끌어올리고 있다.
2012년부터 도입한 ‘영재 입단’ 시스템은 선수층이 부족한 상황에서 유망주를 일찍 발굴해 재목으로 키우기 위한 묘책이었다. 신진서와 신민준 9단 등 영재 입단 제도를 통해 프로에 데뷔한 기사들은 현재 우리나라 바둑을 이끌어가고 있다.
내년 아시안게임 전 종목 석권 노려
바둑의 수는 우주를 구성하는 원자보다 많다고 거론될 정도로 바둑은 기계가 범접할 수 없는 인간 지성의 최후 보루로 여겼다. 하지만 2016년 이세돌과 구글의 인공지능(AI) 알파고 사이에 이뤄진 ‘인간 대 인공지능’ 간 세기의 대결 이후 상황은 달라졌다. 수천 년간 이어온 포석, 정석은 사라졌고 바둑은 0.1집까지 계산이 가능해졌다. 바둑의 패러다임이 바뀐 셈이다.
하지만 이런 문명사적 전환 속에서 우리나라 기사들은 높은 적응력을 발휘하고 있다. 다양한 인공지능 바둑 프로그램이 개발됐고 기사들은 인공지능과 대국을 통해 새로운 차원의 승부에 익숙해지고 있다. 신진서를 두고 ‘신공지능’이라고 부르는 것은 한편으로 인간적인 바둑이 사라질 거라는 아쉬움을 주지만 인간계에서 가장 복잡한 수를 계산하는 그의 능력은 색다른 경이감을 불러일으키는 것도 사실이다.
우리 바둑계는 코로나19로 인한 비상 상황에도 효과적으로 대응하고 있다. 신진서 9단은 “직접 대국도 가능하지만 온라인으로 두는 것이 크게 불편하지는 않다”고 말하고 목진석 대표팀 감독은 “신진서 등 최고의 기사들은 인공지능을 자기 방식으로 활용하고 있다”고 전했다.
우리나라는 그동안 걸출한 ‘영웅’을 여럿 배출했다. 1989년부터 세계 바둑에서 뚜렷한 획을 그은 스타 기사들은 대부분 우리나라 출신이었다. 광저우 아시안게임에서 처음 등장한 바둑 종목에서는 3개의 금메달을 싹쓸이했고 2022년 항저우 아시안게임에서 다시 전 종목 석권을 노리고 있다.
김만수 8단은 “중국이 시장 면에서는 여전히 압도적이지만 커제가 일인자 그룹에서 밀려나는 반면 우리나라의 신진서와 박정환이 위력을 과시하고 있다”며 “코로나19로 중국 기원의 집체적 연구가 약화된 측면도 있다. 집중력이 강한 우리 기사들이 당분간 패권을 차지할 것 같다”고 말했다.
김창금 <한겨레> 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