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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구로구 개봉3동 이애희(82) 씨가 사는 빌라를 찾았을 때, 그는 막 외출을 하려던 참이었다. 이애희 씨는 대한민국임시정부 임시의정원 초대 의장과 주석을 지낸 석오(石吾) 이동녕(李東寧·1869~1940) 선생의 손녀다. 작은 원룸에 들어서니 이 씨는 “요즘 거동도 불편해지고 사람 이름이 자꾸 생각이 나지 않는다”며 “치매가 오는 것 같아 겁난다”고 했다.
▶ 1 석오 이동녕 선생은 상하이로 건너가 임시의정원의 초대 의장을 맡아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의 산파역을 수행했다. 왼쪽부터 김구, 박찬익, 이동녕, 엄항섭 선생 ⓒ독립기념관 2 피우진 국가보훈처장이 1월 15일 서울 구로구에 위치한 이동녕 애국지사의 손자녀 이애희 씨 가정을 방문해 생활지원금을 전달하고 위문하고 있다. ⓒ국가보훈처
이 씨는 피우진 국가보훈처장이 다녀간 이야기를 했다. 독립유공자 손자녀 생활지원금을 처음 지급하는 1월 15일, 피우진 처장이 독립운동가 이동녕 선생의 손자녀인 이애희 씨를 직접 방문해 지원금을 전달했던 것이다.
“피 장관이 ‘선조께서 좋은 일을 하고 가셨는데, 긍지를 갖고 기쁘게 사시라’고 하더라고요. 늘그막에 무슨 낙이 있겠냐고 했더니, 생활지원금을 갑자기 받은 것처럼 앞으로 좋은 일이 많이 생길 거라면서 그동안 신세진 친구들에게 한 턱 쏘라고 금일봉까지 주고 가셨어요.”
국가보훈처는 생계 곤란 독립유공자 손자녀 생활지원금을 신설해 지난해 12월 말까지 1만 3640명의 신청을 받았다. 이 중 생활이 어려운 독립유공자 손자녀 3007명에게 2018년 1월 15일부터 생활지원금을 지급했다.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해 현충일 추념사에서 “독립운동을 하면 3대가 망한다”는 인식을 불식시키고 “애국이 보상받는 나라를 만들어가겠다”라고 국민들에게 한 약속을 정부가 지킨 것이다.
생활 어려운 독립유공자 손자녀에게 우선 지급
이에 국가보훈처는 보상금을 받지 않는 독립유공자 손자녀 중 생활이 어려운 이들을 위해 2018년 예산에 526억 원을 반영했다. 또 독립유공자 유족을 위한 심리상담서비스도 도입하기로 했다. 생활이 어려운 독립유공자 손자녀에게는 가구당 소득이 기준중위소득 50% 이하일 경우 46만 8000원, 70% 이하일 경우 33만 5000원을 매월 지급한다.
국가보훈처는 지난해 11월 유가족으로 등록되지 않은 신규 발굴자 3788명 등 6만 290명에게 지급 신청을 안내했고, 12월 말까지 독립유공자 손자녀 1만 3640명이 신청했다. 지난 1월 15일에는 신청자 중 생활수준 조사가 필요 없는 기초수급자 등 3007명에게 11억 7000만 원을 우선 지급하고, 1월 미지급자 1만 453명은 범정부사회보장정보시스템을 통한 생활수준 조사를 실시한 이후 지급기준에 해당될 경우 1월분까지 소급해 지급한다. 이 씨도 지난해 연말 주민센터로부터 “이동녕 선생과의 가족관계를 증명할 서류를 제출하라”는 통보를 받았다고 한다.
이동녕 선생은 25세 되던 1894년 결혼해 이듬해 첫아들 이의직을 낳았다. 이의직은 석오가 세운 신흥무관학교를 졸업하고 1915년 사망했다. 이에 앞서 부인과 둘째 아들 이의식(1900~?)과 셋째 이의배 등은 고국으로 돌아왔다. 이애희 씨는 “큰아버지 이의식은 경성제국대학 의학부를 1회로 졸업하고 의학박사가 돼 서울에서 ‘이의식 내과병원’을 개원했다”며 “나는 셋째 아들 이의배의 막내딸(2남 1녀)”이라고 했다.
이의식은 해방 후 미군정 민주의원에 뽑혔고, 반민특위 감찰관을 지냈으나 6·25 때 납북됐다. 그는 이철희(1925~1976)와 이석희(1932~2014) 두 아들을 뒀다. 이철희 씨는 미국 샌프란시스코대학을 졸업하고 해방 후 귀국해 경무대 대통령 비서관, 문교부 편수국장, 국사편찬위원회 사무국장, 서울교대 학장 등을 지냈다. 이석희 씨는 경기고·서울대 법대를 졸업하고 대우개발 사장, 대우그룹 부회장, 대우증권 회장을 지냈다.
“할아버지 이동녕 재평가돼야”
이애희 씨는 “독립유공자 연금은 장손에게만 주었기 때문에 아버지는 연금 혜택을 받지 못했다”며 “정부에서 올해부터 독립유공자 손자녀들에게 생활지원금을 주는 것은 참 잘한 일”이라고 했다. 이 씨는 기초생활수급자로 받는 생계급여에다 독립유공자 손자녀 생활지원금을 합치면 이전의 생활보다 훨씬 나아질 것으로 보인다.
이 씨는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큰집에 폐를 끼치지 않고 가정을 꾸려나가려던 어머니를 생각할 때마다 가여웠다”며 “풍문여고를 졸업하고 이화여대 정치외교학과에 합격했으나 등록금 걱정에 꿈을 접고 어머니와 단둘이 살아왔던 세월이 서글프기만 하다”고 했다.
이동녕 선생은 대한민국임시정부 임시의정원 초대 의장, 주석 등을 역임하며 평생을 독립운동에 헌신했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대통령장을 추서했다. 이동녕 선생은 3·1운동이 일어나자 상하이로 건너가 임시의정원의 초대 의장을 맡아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의 산파역을 수행했다. 그리고 통합임시정부의 내무총장에 이어 국무총리와 대통령 직무대리·주석 등을 역임하면서 20여 년 동안 임시정부를 이끌었다.
김구도 <백범일지>에 “금일의 오인(吾人)을 있게 한 이면에는 이동녕의 지원이 있어 가능하였다”고 했듯이 일곱 살 아래인 백범은 선생을 부형(父兄)처럼 떠받들었다. 1939년 임정의 네 번째 주석(1939∼1940)이 되어 김구와 합심해 전시 내각을 구성, 시안(西安)에 군사특파단을 파견했다. 선생은 일흔이 넘은 노구를 이끌고 김구와 함께 광복군 창설을 위해 노심초사하다가 급성폐렴으로 광복을 목전에 두고 이국 땅 기강에서 1940년 3월 71세의 나이로 순국했다. 1948년 사회장으로 봉환식을 거행했고, 효창원에 안장했다.
이애희 씨는 “‘이동녕이 군자금 가지러 왔다’고 하면, 우리 집 주위에 일본 순사들이 쫙 깔렸던 기억이 어렴풋하게 난다”고 했다. 이 씨는 “일본을 상대로 조국 독립이라는 대의를 위해 살아가신 할아버지의 삶의 자세는 범인으로서는 가늠조차 하기 어렵다”며 “내년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계기로 할아버지의 삶과 공적이 재평가됐으면 좋겠다”고 했다.
오동룡│위클리 공감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