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9년 달성군 문산리에 살던 젊은 부부 사이에 아들이 태어났다. 홍역으로 딸과 아들을 차례로 앞세운 부모에게 찾아온 아이는 세상 무엇보다 귀한 존재였다. 아들이 태어난 지 1년 정도 됐을 무렵인 1950년, 부부는 전쟁이 터졌다는 소식을 들었다. 일가는 피란길에 올랐다. 지금의 대구 서구에 있는 친척집으로 가던 그날은 유난히 뜨거웠다. 아기의 얼굴에 땀이 맺혔다. 아버지는 피란길 인근에 있는 금호강 물을 손으로 떠 땀으로 얼룩진 아들의 얼굴을 닦아주었다. 아버지는 젖먹이 아이를 둔 채 나라를 지키기 위해 참전했다. 그리고 돌아오지 않았다. 아들은 아버지의 얼굴을 모르고 자랐다.

▶ 경북 칠곡에 있는 다부동 전적기념관을 가리키는 윤팔현 씨 ⓒC영상미디어
68년의 세월이 흘렀다. 아들 윤팔현 씨는 귀여운 손녀의 웃는 얼굴을 보는 게 낙인 할아버지가 됐다. 윤 씨의 삶은 고단했다. 어린 시절 소아마비 감염 후유증으로 오른쪽 팔을 못 쓰게 됐다. 남편 없이 아픈 아들을 홀로 키워야 했던 어머니에게도 모진 세월이었다. 윤 씨는 어머니에게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거의 듣지 못했다. 윤 씨의 어머니는 약주가 한잔 들어간 날이면 이따금 아버지의 이야기를 꺼냈다. 윤 씨는 그때 알았다. 아버지가 땀에 젖은 자신의 얼굴을 닦아줬다는 것을.
윤 씨에게 아버지 윤 일병은 그리움 그 자체였다. 성치 못한 몸으로 살다 보니 그리움은 더욱 짙어졌다. 아버지를 찾는다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불현듯 아버지가 참전했던 전투라도 알고 싶다는 마음이 강하게 솟구쳤다.
“6·25전쟁 당시 낙동강 전선에서 치렀던 다부동 전투가 가장 치열했다고 알고 있어요. 그래서 경북 칠곡에 있는 다부동 전적기념관에 가면 당시 참전했던 군인, 경찰, 사망자의 이름이 다 새겨져 있다는 말을 들었어요. 그래서 혹시 아버지 이름도 있을까 싶어서 갔더니 없더라고요. 담당자에게 왜 각인이 안 됐는지 물으니까 대한민국 6·25 참전 유공자회에 문의하라 하더군요. 거기에 아버지가 전쟁에 참전했다는 증거를 들고 찾아가서 심의를 해달라고 했어요. 며칠 뒤에 다부동 전적기념관에 아버지 이름을 새겼다는 연락을 받았죠. 아버지가 참전한 전투를 알게 되니까 아버지를 찾고 싶다는 생각이 더욱 간절해졌어요.”

▶ 1 6·25전쟁에 참전했다 순국한 고 윤경혁 일병|국방부 2 지난 6월 19일 윤팔현 씨 자택에서 열린 윤경혁 일병 귀환식 ⓒ국방부 3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에게 전달받은 전사자 신원확인 통지서를 들고 있는 윤팔현 씨 ⓒC영상미디어
68년의 세월, 1만 5000km를 돌아 고국에 온 아버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수십 년 전 어느 전투에서 사망한지도 모르는 아버지의 흔적을 찾는 것은 거의 망상에 가까웠다. 그러다 2001년 무렵 텔레비전을 보는데 DNA를 등록하면 참전용사의 유해를 찾을 수 있다는 내용이 흘러나왔다. 윤 씨는 이거다 싶었다. 그 길로 대구 달성군보건소를 찾아가 바로 DNA를 등록했다. 실낱같은 희망을 걸고 소식을 기다렸지만 매년 국방부에서 날아온 소식은 같았다. ‘고인의 유해를 찾지 못했다. 유해를 찾을 때까지 최선을 다하겠다.’
그로부터 10년이 넘는 세월이 흘렀다. 윤 씨의 어머니가 유명을 달리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지 9년이 흘렀다. 지난 5월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이하 국유단)에서 윤 씨를 찾는 전화가 왔다. 아버지 유해를 찾았다는 소식이었다.
윤 일병의 유해는 북한에 있는 평안남도 개천시에서 발견됐다. 개천시는 북한과 미국이 공동으로 유해발굴을 했던 지역이다. 6·25전쟁에 참전했던 미군의 유해인 줄 알고 미국 하와이에 있는 미 국방부 전쟁포로 및 실종자 확인국으로 옮겨졌다. 그곳에서 신원확인을 위한 정밀 감식 과정을 거치다가 국군으로 추정되는 정강이뼈가 발견됐다. 윤 일병의 유해는 아들인 윤 씨가 등록해놓은 DNA 덕에 빨리 가족을 찾을 수 있었다. 전화가 걸려오고 얼마 지나지 않아 국유단에서 윤 씨와 윤 씨의 고모, 삼촌의 DNA를 다시 채취해 갔다. 검사 결과 세 사람 모두 99.9% 일치 판정을 받았다.
지난 6월 19일 윤 씨가 살고 있는 대구 다사읍 문산리에서 ‘호국영웅 귀환식’이 열렸다. 국유단 단장, 대구 지역 군 관계자를 비롯해 유가족 30여 명이 모인 자리에서 윤 일병의 전사자 신원확인 통지서와 국방부 장관 위로패가 전달됐다.
윤 씨는 이날 행사에서 그토록 궁금했던 윤 일병의 참전 경로를 알게 됐다. 윤 일병은 1950년 11월 미군 1기병사단 소속으로 참전했다. 같은 해 9월 우리 군이 인천상륙작전에 성공해 반격작전을 개시했던 때 북한 땅까지 올라갔다 중공군이 2차 공세를 펼친 11월 25일 무렵 전사한 것으로 추정됐다.
윤 일병의 유해는 아직 미국 하와이에 있다. 7월 12일이면 우리나라로 돌아온다. 북한에서 미국 하와이를 거쳐 다시 고국으로 오기까지 68년, 장장 1만 5000km에 걸친 길고 긴 귀향길이다. 윤 일병의 유해가 한국에 도착하면 다시 한 번 나라를 지키는 데 목숨을 바친 참전용사에 예우를 다하는 행사가 열릴 예정이다.
윤 씨는 아버지가 돌아오면 고향에 있는 선산에 모실 생각이다. 국방부에서는 유해를 국립묘지에 안장할 것을 권했지만 거절했다. 오랜 세월 고향을 떠나 타향에 묻혀 있던 아버지가 이제 고향땅에서 편안하게 쉬길 바라는 아들의 마음이다.
“아버지를 선산에 모신 다음 돌아오는 어머니 기일에 첫 제사를 지낼 거예요. 아버지를 찾은 다음 처음으로 모시는 제사니 감회가 남다르겠죠. 하늘에 계신 어머니도 68년 만에 돌고 돌아 고향에서 쉬는 아버지도 기뻐하시겠지요. 이제야 자식 된 도리를 다했다고 생각하니 한결 마음이 가볍습니다.”
장가현│위클리 공감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