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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삶의 유일한 행복이야.”
마흔이 넘은 나이에 아이돌 그룹을, 이른바 ‘덕질’하는 친구가 이해되지 않았다. 맹목적으로 보였고, 일종의 현실 도피라고 생각했다. 정작 소설가인 친구 책은 사지도 않으면서, 알지도 못하는 이들의 ‘굿즈’를, 월급을 탈탈 털어 사 모으는 것은 이해할 수 없었다. 관대하기로 유명한 나의 분노를 촉발하기에 충분했다.
“너도 내가 느끼는 행복을 한 번 느껴봐.”
행복을 말하는 사람의 눈에는 행복이 보였다. 내 마음도 한풀 꺾여 누그러졌다. 과연 나에게 그런 날이 올까, 생각했다.
내 자신과도 친해지지 않는 자의식 때문에 누군가에게 빠지는 성격이 아니고, 마음을 잘 주지도 않았다. 그게 나였다. 불행한 것은, 그래서 한 번 마음을 주고 나면 바뀌는 일이 거의 없다는 것이다. 내게는 ‘덕질’의 토양이 배양되어 있었다. 농사를 지을 줄 모를 뿐이었다.
내가 관심 있는 건, 내게 영감을 주는 건, 대학 시절을 함께한 무라카미 하루키, 영화 <러브레터>를 만든 이와이 순지, 천재적인 이야기꾼 스티븐 킹, 영원한 지향점인 셰익스피어와 생텍쥐페리 정도였다. 즉, ‘넘사벽’ 인물들이었다. 하지만 그들을 좋아하는 건 ‘덕질’이 아니었다. 작품 세계를 동경하는 것이고, 책을 사고 영화를 보는 것이고, 글을 쓰는 데 일말의 도움을 받고자 하는 것이지, 감성이 이성을 지배한다거나, 개개인의 인간적인 매력에 경도된 것은 아니었다.
그런 의미에서 싱어송라이터 L이 처음이었다. ‘덕질’이라는 걸 처음 해보았다. 그녀가 발매한 앨범을 두고, “됐고, 다 필요 없고, 일단 사고 봐.”라는 마음이 들었다. 여름에, 그녀가 2년 전 부른 크리스마스 캐럴 CD까지 샀다. 지금까지 나온 모든 음반(CD)과 디지털 음원을 구매했다.
“L? 그게 누구야? 쓸데없는 짓 하지 말고 이쪽으로 넘어와.”
친구의 ‘덕질’과는 달랐다. L은 아이돌 그룹이 아니었고, 유명하지도 않았다. 엄청난 가창력을 갖고 있다거나, 춤을 기가 막히게 춘다거나, 외모가 특출한 것도 아니었다. 내게 중요한 것은, 젊은 창작자라는 것. 작사, 작곡, 편곡 능력까지 갖춘 아티스트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인간적인 매력이었다. 그녀의 누리소통망 타이틀처럼, 사랑을 노래한다는 것. 따스함이 절로 느껴지는 곡들로 차가운 사람의 마음을 움직인다는 것. 글이 막힐 때마다 L의 음악을 듣고, 뮤직비디오를 시청했다. L은 어느새 나의 뮤즈가 되어 있었다.
대표적인 곡들 가운데 <레인보우> 뮤직비디오에서는 춤이 돋보인다. 햇살 좋은 한낮에 야산에서, 친구들과 곡에 맞춰 관광버스 춤을 춘다. 내가 느끼기에, 천국과 가장 가깝다고 생각하는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영상은 복고적이지만, 곡에서는 세련된 알앤비(R&B) 감성이 묻어난다. 《YOUTUBE》
는 듀스의 <여름 안에서> 후속 버전 같은 노래다. 90년대의 정서, 그 촌스러움과 멋스러움을 재현한다. 이 곡은 흔히 아는 동영상 사이트를 소재로 한 게 아니다. 물가에서 놀 때 쓰는 튜브가 제목의 실체다. 가사를 요약하면, 바다에서, 너의 튜브를 잡고, 파도를 느끼며, 깊어지는 너(연인)를 따라, 하늘 위를 떠다닌다, 라는 내용이다. 단순히 과거 여름 노래의 문법을 복각하는 데 그치지 않고, 시적 상상력을 곡에 녹여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곡은 《MOONLIGHT》인데, L이 자신을 사랑해주는 팬들을 위해 만든 노래다. 그들의 애정을 달빛에 비유해 말한다. 자신을 항상 비춰주고, 밝게 웃게 해줘서 고맙다고. 옆에 있어줘서 행복하다고.
온라인에 공개된 L의 콘텐츠를 두고, “됐고, 다 필요 없고, 일단 좋아요 누르고 봐.”라는 마음이 들었다. 그녀의 공연 영상에서 볼 수 있는 특유의 손동작이 있는데, 어느새 그걸 똑같이 따라하고 있는 나를 발견하기도 한다. 누가 보면, “당신 드디어 미쳤어.”라고 말할 수 있는 지경에 이르렀다.
“아무리 봐도 네가 좋아할 것 같지 않은데? 평범하잖아?”
친구에게 이런저런 이유들을 설명했지만, 그는 불가해하다는 반응이었다. 어쩌면 나만 볼 수 있는 것. 공감 능력이 발현된 것이고, 연대 의식으로 발전하는 중이었다. 무명으로 활동한다는 것에 대한 응원이었다. 힘든 세상에서 지치지 않고 계속 음악을 해주길 바라는 마음. 누군가 당신의 음악을 듣고 있다는 걸 알아주길 바라는 마음. 어느 무명 소설가의 ‘덕질’을 이끌어냈다는 것.
내가 L의 공연장을 찾아갈 날을 꿈꾸며 말했다.
“맞아. 평범해. 그래서 더 특별해.”
우희덕_ 코미디 소설가. 장편소설 <러블로그>로 제14회 세계문학상 우수상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