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을 달린다. 바람이 달다. 제주의 바람은 결이 다르다. 바람이 불어오는 곳을 따라 금방이라도 귤꽃 향 가득한 감귤 밭이, 울창한 삼나무 숲이, 에메랄드 빛 바다가 펼쳐질 것만 같다.
최고의 드라이브를 위해 고가의 차량을 빌렸다. 뚜껑이 열리는 빨간색 스포츠카. 하루 대여료가 호텔 숙박비와 맞먹는다. 기름은 하마처럼 먹는다. 길에 돈을 뿌리고 다니는 셈이지만 멈출 생각은 없다. 계산기를 들고 여행하는 건 피곤한 일이다. 길고 긴 인생에서 하루쯤은 오늘만 살 것처럼 살고 싶다.
공항 주변을 벗어난 제주의 도로는 월급날 퇴근길만큼 아름답다. 눈에 익은 풍경들도 새롭다. 서귀포 중산간을 가로지르는 산록남로에 이어 녹산로를 달리다 보면, 주체할 수 없이 가슴이 벅차오른다. 묵은 체증이 다 내려간다. 거대한 풍력 발전기가 제주의 시계처럼 느리게 돌아간다. 따스한 빛을 머금은 억새가 하늘하늘 흔들린다. 일렁이는 은빛 물결에 젖어 들다 보면 어느새 해안도로가 모습을 드러낸다. 드문드문 야자수가 이국적인 정취를 자아내고, 검은색 화산 지형과 눈부신 백사장이 교차한다. 언뜻 보면 다 비슷해 보이는 바다 풍경이지만, 똑같은 곳은 한 군데도 없다. 제주에 매료된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만의 바다가 있다. 파도가 밀려드는 모래밭에 사랑을 새기는 연인들처럼, 길이 끝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달린다. 나를 추월하는 이들 너머로 끝없이 바다가 펼쳐진다.
때로는 길을 헤매도 좋다. 길을 잃어버려도 상관없다. 관광지도에 없는 숨겨진 곳들이 그렇게 발견된다. 호젓하게 낚시를 즐길 수 있는 포구, 이름 모를 작은 오름, 낮은 돌담에 아기자기한 집들이 모여 있는 마을, 노루가 뛰어노는 신비한 곶자왈까지. 파란 하늘에서 별이 떨어질 때까지, 나는 지칠 줄 모르는, 호기심 많은 아이이고 싶다.
잠시 잊었다. 제주에서는 마음은 비우고 배는 채워야 한다. 뱃살에 손을 얹고 굳게 다짐한 대로, 돌하르방에 맹세코, 하루에 다섯 끼는 먹어야 한다. 공항 근처 해장국집에서 몸국을 먹고, 표선에 위치한 국숫집에서 멸치국수를 먹은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이제 시작이다. 기왕이면 한 자리에서 다양한 음식을 맛볼 수 있는 곳으로 간다. 서귀포 전통시장에 스포츠카를 주차한 나는 큰손이 된 기분을 한껏 만끽한다.
“여기서부터 여기까지 다 주세요.”
그렇게 말하면 세상에서 가장 능력 있는 사람이 될 것만 같아 목구멍이 근질근질하다. 그런 마음으로 마늘통닭, 딱새우회, 오메기떡, 한라봉을 구입한다. 얼마 들이지 않고 세상을 다 가졌다.
제주에 올 때마다 빼놓지 않고 가는 곳. 나의 바다, 세화해변을 거닌다. 주변이 석양으로 붉게 물든다. 더없이 완벽한 하루라고 생각했는데, 이상하게 찜찜하다. 뭔가 하나 빠져 있었다. 그때였다.
“저기, 제가 혼자 와서 그런데, 같이 흑돼지 먹지 않을래요?”
그것은 흑돼지였다. 그리고 그걸 같이 먹어줄 그녀였다. 아름다운 해변의 여인.
“흑돼지든, 백돼지든 상관없으니 빨리 가시죠.”
그래야만 했다. 그랬어야만 했다.
부푼 꿈을 안고 제주 여행을 시작한 지 채 한 시간도 되지 않아 사고가 났다. 새별오름 근처 나홀로나무를 보러 가는 길. 길에 쓰러져 있던 나무를 피하다가 차가 도랑으로 떨어졌다. 보닛이 찌그러졌고, 범퍼가 완파됐으며, 바퀴 한 쪽이 뒤틀렸다. 한 푼이라도 아껴보려 저렴한 차를 빌리고, 별도의 사고 보상 보험도 들지 않았는데, 이걸 물어줄 돈이면 빨간색 스포츠카를 빌려, 가고 싶은 곳을 다 가고, 먹고 싶은 걸 다 먹는 것도 가능하겠다. 렌터카 업체에서는 담당자와 연락이 되지 않아 출동 업무가 지연되고 있으니 기다리라는 말뿐이다.
제주의 날씨는 변덕스럽다. 비와 바람이 갈수록 거세진다. 우산은 속절없이 망가졌고, 어디선가 미역이 날아와 얼굴을 때린다. 내 머리다. 저 앞에 한라산이 아닌 먹구름이 만든 킬리만자로가 보인다. 절로 처절한 배경 음악이 깔린다. 어찌 해야 할지,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는 나는 절규한다.
바람처럼 왔다가 이슬처럼 갈 순 없잖아. 내가 산 흔적일랑 남겨 둬야지.
우희덕_ 코미디 소설가. 장편소설 <러블로그>로 제14회 세계문학상 우수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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