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인기, ‘크리스탈 산수도’, 캔버스에 아크릴, 크리스탈, 182×140cm, 2017
▶황인기, ‘방(倣) 금강전도’, 합판에 플라스틱, 레고블록, 307×201cm, 2001
세상엔 승패를 가를 수 있는 경우와 그렇지 못한 것이 있다. 스포츠와 예술이 그렇다. 스포츠는 객관적인 기록과 점수로 승부가 명확히 결정된다. 반면 예술(작품)은 그렇게 할 수 없다. 그 가치를 수치화·계량화하기 곤란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어떤 작품을 좋다 나쁘다 판단하거나 혹은 1등 2등 순위를 매기는 것은 주관적일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실제론 예술(작품)을 인위적인 잣대로 평가하고 서열화해서 줄 세우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이를 두고 자본주의 경제 논리와 세속적인 상업주의에 고귀한(?) 예술이 휘둘린다며 한탄하는 사람도 있다. 틀린 말은 아니다. 예술(작품)은 점수로 승패가 판가름 나는 스포츠와는 분명 다르니까. 그럼에도 스포츠와 예술을 이렇게 견줘 설명하면 어떨까? “스포츠계에 올림픽이 있듯이 미술계엔 비엔날레가 있다” “비엔날레는 미술계 올림픽이다”라고.
‘2년마다’라는 어원을 지닌 단어 비엔날레(Biennale)는 대규모 국제 현대미술 전시회를 뜻하는 고유명사가 됐다. 세계 최초로 비엔날레가 열린 도시는 이탈리아 대표 관광도시 베니스다. 1895년 처음 시작했으니 역사가 100년이 훌쩍 넘는다. 2019년엔 58회 베니스비엔날레가 열렸다. 예정대로라면 2년 후인 2021년 59번째 비엔날레가 열릴 차례지만 코로나19 탓에 2022년 4월 23일 59회가 열릴 예정이다.
우리 미술계를 대표하는 광주비엔날레
4월 1일, 제13회 광주비엔날레가 우여곡절 끝에 개막했다. 이 역시 2020년 열렸어야 하는데 해를 넘겨 뒤늦게 열린 것이다. 예년보다 규모나 전시 기간도 크게 줄었다. 전시는 5월 9일까지 볼 수 있다. 1995년 시작된 광주비엔날레는 아시아 최초 비엔날레다. 이후 아시아 여러 도시에서 비엔날레가 우후죽순 생겼다. 상하이비엔날레, 타이베이비엔날레 등이 대표적이다.
국내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부산비엔날레, SeMA 비엔날레 미디어아트 서울, 청주 공예비엔날레, 대구 사진비엔날레, 창원 조각비엔날레, 전남 수묵비엔날레…. 그야말로 전국이 비엔날레 전성시대다. 일각에선 피로감을 호소하고 비엔날레 무용론이 제기되기도 했다. 오죽하면 ‘안티 비엔날레’까지 열렸겠는가!
아무튼 자타공인 가장 역사가 깊고 최고 권위로 인정받는 베니스비엔날레야말로 진정 미술계 올림픽이라 할 수 있다. 베니스비엔날레는 본전시와 국가관 전시로 크게 나뉜다. 특히 각 나라에서 독립적으로 운영하는 국가관 전시는 올림픽 못지않게 경쟁이 치열하다. 심사위원단이 가장 훌륭한 전시(?)를 선정해 황금사자상을 수여하는 시상제도가 흥행과 경쟁을 부추기는 데 한몫한다.
우리나라는 1995년 베니스비엔날레 주 무대인 자르디니 공원에 국가관을 마련했다. 그때부터 고 전수천·강익중·이불 작가가 연이어 특별상을 받았지만 아직까지 황금사자상을 수상하지 못했다. 다만 2015년 본전시에 참여한 임흥순 작가가 ‘위로공단’이란 제목의 영상 작품으로 은메달 격인 은사자상을 받았다. 사정이 이러하니 베니스비엔날레, 특히 국가관 전시에 참여한 작가는 마치 올림픽에 출전하는 국가대표 운동선수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전통을 디지털로 해석한 아날로그 작가
황인기 작가도 그런 경우다. 그는 2003년 베니스비엔날레 한국관 전시에 참여했다. 김홍희 전 서울시립미술관 관장이 큐레이터(전시기획자)를 맡은 그해 한국관 전시엔 작가 3명(황인기, 고 박이소, 정서영)이 공동으로 출품했다. 이 전시에서 황인기는 검은색 폐비닐 위에 반짝이는 아크릴 거울 파편을 붙여서 길이 28m 대형 벽화를 선보였다. 동양의 전통적인 두루마리 형식 산수화와 베니스 풍광을 중첩시킨 이미지로 아날로그 산수화를 디지털 화면처럼 번안해 물결치듯 굴곡이 있는 한국관 한쪽 벽면을 가득 채운 작품이었다.
이처럼 황인기의 작품은 시리즈로 ‘픽셀 회화’ 또는 ‘디지털 산수(山水)’ 등으로 불린다. 플라스틱 장난감 레고블록, 반짝이는 크리스털 조각, 공업용 재료인 금속 못(rivet), 실리콘, 인조모피 등 그가 즐겨 다루는 재료는 일반적인 미술용품이 아니다. 이 재료는 돌출된 점(點)으로 두드러지게 표현되며 화면의 여백과 선명히 대비된다. 전통 산수화를 디지털 이미지로 바꿔 입체적인 픽셀로 구현하는 방식이다. 이는 동서양의 시공간을 뛰어넘어 전통과 현대, 물질과 정신의 경계를 비틀고 해체하고자 하는 의도가 반영된 것이다.
황인기는 오랫동안 우리나라의 전통과 정서, 나아가 동양의 정신과 정체성을 표현해왔다. 천성적으로 풍류(風流)를 즐기는 한량(閑良) 같은 성품인 데다 새로운 기법과 재료를 받아들이는 데도 아무런 구애를 받지 않는 자유롭고 열린 태도를 지녔다. 여기에 현대 문명에 대한 깊은 통찰과 혜안이 더해져 일찍부터 독창적인 형식을 완성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작품만큼이나 이력도 독특하고 경력도 화려하다. 1951년 충주에서 태어나 성장한 황인기는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응용물리학과에 입학했지만 곧 중퇴하고 미술 공부를 다시 시작했다. 과학도를 꿈꾸던 순수한 영혼의 청춘이 한순간 예술로 방향을 튼 것이다.
서울대 미술대학 회화과를 졸업하고 뉴욕에서 유학생활을 했다. 그곳에서 프랫인스티튜트 대학원을 졸업하고 10여년 만에 귀국해 충북 옥천 대청호 주변에 있는 폐교를 작업실로 만들었다. 이후 성균관대학교 예술학부 교수로 재직하며 서울과 작업실을 오가는 생활을 규칙적으로 해왔다. 그사이 국립현대미술관의 ‘2007 올해의 작가’로 선정됐고 2017년엔 제29회 이중섭미술상도 받았다. 정년퇴임 후 온전히 폐교 작업실에 은거하며 새로운 작업에 매진하고 있다.
이준희 건국대 현대미술학과 겸임교수_ 미술대학을 졸업했지만 창작에서 전향해 몇 년간 큐레이터로 일했고, 미술 전문지 <월간미술> 기자로 입사해 편집장까지 맡아 18년 8개월 동안 근무했다. ‘저널리스트’로 불리는 것보다 여전히 아티스트에 가까운 ‘미술인’으로 불리기 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