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쇼트트랙 여자대표팀이 2월 14일 중국 베이징 메달플라자에서 열린 2022 베이징동계올림픽 쇼트트랙 여자계주 3000m 메달 수여식에서 단상에 오르고 있다.
현장 취재기자가 되돌아본 베이징의 겨울
2022 베이징동계올림픽이 뜨거웠던 대장정의 막을 내렸다. 이번 대회에선 91개 나라 선수들이 7개 종목(15개 세부종목)에서 금메달 109개를 두고 17일간(2월 4∼20일) 치열한 경쟁을 펼쳤다. 동계올림픽 사상 가장 많은 금메달이 달린 대회였지만 이번에도 메달보다 빛난 건 선수들의 뜨거운 열정이었다. 국민도 성적보다는 선수들의 도전 그 자체에 더 많은 관심과 박수를 보내 올림픽과 스포츠에 대한 달라진 인식을 실감하게 했다. 차가운 빙판과 설원 위에 뿌려진 선수들의 뜨거운 땀방울이 코로나19로 차갑게 얼어붙은 국민의 마음을 따뜻하게 녹인 시간이었다.
입춘(2월 4일)을 맞아 개막한 이번 베이징동계올림픽은 기나긴 겨울이 끝나고 봄이 온다는 의미를 담았다. 대회는 막을 내렸지만 선수들이 뿌린 씨앗은 따뜻한 봄을 맞아 앞으로 더 화려한 꽃으로 피어날 준비를 마쳤다. 국제올림픽위원회(IOC)는 2021년 “더 빨리, 더 높이, 더 힘차게”라는 기존 올림픽 슬로건에 “다 함께”를 더했다. 우리가 함께 만들어갈 미래의 청사진을 보여준 선수들의 땀과 눈물이야말로 올림픽 정신이다.
▶2월 11일 베이징 캐피털 실내경기장에서 열린 쇼트트랙 여자 1000m 결승에서 최민정이 은메달을 차지한 뒤 눈물을 흘리고 있다. | 연합
빙질·판정 논란에도
함께 울고 웃은 쇼트트랙팀
쇼트트랙은 우리나라의 주력 종목이다. 1992 알베르빌동계올림픽 때 처음 정식 종목으로 채택된 뒤 쇼트트랙은 그간 우리나라에 많은 금메달을 안겼다. 국민적 기대가 큰 만큼 대회 때마다 대표팀이 느끼는 부담감도 컸다. 금메달이 아니면 만족하지 못하는 분위기도 있었다. 하지만 이번 대회는 달랐다.
‘에이스’ 최민정(24·성남시청)의 뜨거운 눈물은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줬다. 최민정은 쇼트트랙 여자 1000m에서 세계랭킹 1위 쉬자너 스휠팅(네덜란드)에 단 0.052초 뒤지며 은메달을 목에 걸었다. 결승선을 통과한 뒤 최민정은 참았던 눈물을 빙판 위에 쏟아냈다.
그는 경기 뒤 기자들과 만나 “기쁨의 눈물”이었다고 소회를 밝혔다. 일각에선 금메달을 따지 못한 아쉬움에 흘린 눈물이 아니냐는 추측도 있었지만 최민정은 오히려 “지난 힘든 시간이 나를 더 강하게 만들었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눈물의 이유를 설명했다. 그에겐 메달보다도 도전의 과정이 중요했던 셈이다. 최민정의 눈물에 뜨거운 응원이 쏟아졌음은 물론이다.
하나가 돼 은메달을 일궈낸 여자 쇼트트랙 대표팀의 계주 3000m 질주도 뜨거운 감동을 줬다. 대표팀은 지난 시즌 코로나19로 인해 국제 대회 참가가 좌절되며 어려움을 겪었다. 더욱이 팀 안팎에서 여러 악재가 겹치며 대표팀 선발전 1·3위가 모두 불참하는 시련을 겪었다. 하지만 계주 경기에 참여한 최민정, 김아랑(27·고양시청), 서휘민(20·고려대), 이유빈(21·연세대)은 짧은 훈련 기간에도 불구하고 ‘원팀’ 정신으로 최선의 레이스를 펼쳤다. “메달 색깔과 관계없이 값진 결과”(이유빈)라며 웃을 수 있었던 이유다.
박장혁(24·스포츠토토)이 보여준 부상 투혼도 깊은 인상을 남겼다. 박장혁은 쇼트트랙 남자 1000m에서 넘어지는 상대 선수와 충돌하며 왼쪽 손이 찢어지는 상처를 입었다. 무려 11바늘을 꿰맬 정도로 큰 상처였지만 그는 붕대를 감고 다시 경기에 나섰다. 비록 이번 대회 개인전에서 메달을 따진 못했지만 올림픽에 대한 그의 열망과 간절함은 많은 이들에게 위로와 용기를 줬다.
▶임남규가 2월 6일 베이징 옌칭의 국립 슬라이딩센터에서 열린 남자 루지 싱글 3차 레이스를 펼치고 있다.
부상과 트라우마 넘어…
루지팀의 뜨거웠던 도전
비인기 종목인 루지 대표팀도 눈에 띄었다. 임남규(33·경기도루지연맹)의 기적과도 같은 올림픽 출전은 그 자체로 드라마였다. 임남규는 2021년 12월 말 독일에서 훈련하던 도중 루지 전복 사고를 겪었다. 정강이뼈가 드러날 정도로 크게 다친 그는 긴 고민 끝에 귀국을 결심했다. 수년간 준비한 올림픽을 약 한 달 앞두고 포기해야 하는 상황. 그는 이날 운동을 시작한 뒤 처음으로 울었다. 몸이 아파서가 아니라 대회를 포기해야 한다는 고통 때문이었다.
간절한 마음 덕분일까? 기적이 일어났다. 수술을 성공적으로 마친 임남규는 남은 대회에 출전하기만 하면 출전 점수를 쌓아 올림픽 출전권을 딸 수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다행히 수술은 성공적이었고 몸이 버틸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무엇보다 그에겐 올림픽이 너무나 간절했다. 이미 2018 평창동계올림픽 뒤 은퇴를 선언했음에도 올림픽에 대한 열망으로 현역 복귀를 했던 그였다. 결국 그는 다리에 붕대를 감은 채 3일 만에 라트비아로 다시 출국했다. 그리고 결국 베이징행 출전권을 따냈다.
베이징에 도착한 그는 자신의 인스타그램에 “나의 두 번째 올림픽? 이거 실화 맞나?”라고 적었다. 그만큼 믿기 힘든 일이었다. 임남규는 이번 대회에서 34명 가운데 33위를 기록해 좋은 성적을 내지는 못했다. 하지만 결승선을 통과할 때마다 그는 두 손을 번쩍 들거나 머리 위로 하트를 그리며 누구보다 행복해했다. 그에겐 올림픽 참가 자체가 기적이었기 때문이다. 국민도 그의 여정에 진심 어린 박수를 보냈음은 물론이다.
평창 대회 때 귀화한 아일린 프리쉐(30·경기도청)의 도전도 감동을 자아냈다. 독일 국적이었던 그는 올림픽 출전을 위해 평창 대회를 앞두고 우리나라에 귀화했다. 당시 “사실 한국을 잘 모르지만 앞으로 알아가고 싶다”라며 솔직한 인터뷰를 해 화제를 모으기도 했던 그는 많은 귀화 선수가 자신의 나라로 돌아가는 동안에도 우리나라에 남았다. 우리나라를 잘 모르던 그는 이제 손톱에 태극기 네일아트를 그리며 우리말로 유창하게 인터뷰를 하는 선수가 됐다.
프리쉐 역시 베이징에 오는 길이 험난했다. 프리쉐는 평창 대회가 끝난 뒤 2018∼2019시즌 월드컵 8차 대회에서 루지가 전복되는 사고를 당해 손이 부러지고 꼬리뼈가 골절되는 큰 부상을 입었다. 2021년 여름까지 훈련도 제대로 못 할 정도로 큰 상처였고 트라우마 때문에 정신적 고통을 겪기도 했지만 그는 오직 올림픽을 위한 열망으로 다시 썰매 위에 올랐다. 결국 그는 무사히 베이징동계올림픽을 완주하며 자신의 선수 생활을 아름답게 마무리했다.
특히 루지 대표팀은 이번 대회에서 전 종목 자력으로 올림픽 출전권을 따냈고 3회 연속 전 종목 출전이라는 역사를 썼다. 강원 강릉 외에는 전용 경기장 하나 없을 정도로 열악한 환경 속에서 루지에 대한 열정 하나만으로 만든 값진 기록이다.
▶차준환이 2월 10일 베이징 캐피털 실내경기장에서 열린 피겨스케이팅 남자 싱글 프리스케이팅 경기에서 오페라 '투란도트'의 음악에 맞춰 연기를 펼치고 있다. | 연합
피겨 역사 쓴 차준환…
희망 뿌린 ‘김연아 키즈’들
피겨스케이팅에선 새로운 희망이 싹을 틔웠다. 피겨 전설 김연아의 경기를 보고 자란 ‘김연아 키즈’들이 심은 씨앗이다. 이번이 두 번째 올림픽 출전인 차준환(21·고려대)은 피겨스케이팅 남자 싱글에서 5위를 기록하며 우리나라 남자 피겨 역사를 새로 썼다. 종전 최고 기록은 차준환이 2018년 평창에서 기록했던 15위다.
남자 피겨는 하뉴 유즈루(일본), 네이선 첸(미국) 등 세계적인 실력자들이 많아 그 벽이 높았다. 차준환의 경우엔 이번 대회 10위 안에만 들어도 성공이라는 평가가 지배적이었다. 고난도 기술을 자유자재로 쓰는 강적들 앞에서 차준환은 자신만의 연기를 펼치기로 했다. 그는 쇼트프로그램에서 한 번의 실수도 없이 무대를 마치며 4위에 오른 데 이어 프리스케이팅에선 첫 점프인 쿼드러플(4회전) 토루프 점프에서 넘어진 뒤에도 남은 6개 점프를 깔끔하게 수행하며 종합 5위에 올랐다.
차준환은 이날 경기 뒤 “초반에 크게 넘어지는 실수를 했지만 나머지 구성 요소를 잘 마무리하려고 했다”면서 “올림픽인 만큼 경기하는 순간순간을 느끼려고 했고 기억하려고 했다. 그 목표 안에서 잘해낸 듯하다. 이번에 아쉬운 점을 보완해서 앞으로 더 강한 선수로 성장하겠다”고 했다.
그는 다음 대회를 기약하며 “더 많은 4회전 점프를 구성 요소에 넣고 깨끗한 프로그램을 펼치고 싶다. 숙제가 될 것 같다”라고 밝혔다. 다음 대회에서도 그의 목표는 메달이 아닌 자기 자신의 한계를 넘는 일이었다.
우리나라 피겨스케이팅은 이번 대회에서 차준환 외에도 이시형(22·고려대), 유영(18·수리고), 김예림(19·수리고)이 은반 위를 누비며 자신의 첫 올림픽 무대를 꾸몄다. 꿈을 향한 그들의 아름다운 움직임은 국민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앞으로 이들이 만들어갈 무대가 더욱 기대되는 이유다.
이준희 <한겨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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