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월 16일 중국 베이징 캐피털 실내경기장에서 열린 2022 베이징동계올림픽 쇼트트랙 남자 5000m 계주 결승에서 은메달을 획득한 대한민국 남자 쇼트트랙 대표팀의 곽윤기가 시상대에 올라 그룹 방탄소년단(BTS)의 ‘다이너마이트’ 춤을 추고 있다.
“쇼트트랙은 역시 한국이다.”
2022 베이징동계올림픽 개막을 한 달 앞둔 지난 1월 충북 진천 국가대표선수촌에서 만난 최민정(24·성남시청)은 대회를 마치고 전 세계인들로부터 이 말을 가장 듣고 싶다고 했다. 우리나라 쇼트트랙이 부진과 내홍에 힘겹던 시기였다. 어렵사리 4년 만에 돌아온 올림픽 무대 마지막 경기. 최민정은 1500m 여자 결승에서 스스로 금메달을 목에 걸며 이 공식을 다시 증명했다. 2018년 평창과 4년 뒤 베이징. 빙판 위 마지막 주인공은 끝내 모두 최민정이었다.
그야말로 ‘디펜딩 챔피언’다운 경기였다. 최민정은 2월 16일 중국 베이징 서우두체육관에서 열린 2022 베이징동계올림픽 여자 쇼트트랙 1500m 결승에서 2분 17초 789를 기록하며 1위로 결승선을 통과했다. 1위로 레이스를 시작한 최민정은 절반을 지난 시점부터 폭발적인 질주로 상대를 압도했다. 범접할 수 없는 속도였다.
앞서 2월 11일 여자 1000m 은메달을 확정한 뒤 감격의 눈물을 흘리기도 했던 최민정은 이날 금메달을 목에 건 뒤 환하게 웃었다. 2018 평창동계올림픽에 이은 1500m 2연패다. 이로써 최민정은 모두 5개의 올림픽 메달(금메달 3개+은메달 2개)을 목에 걸게 됐다. 우리나라 쇼트트랙 최고 에이스다운 위용이다.
최민정은 이날 작정을 한듯 했다. 금메달로 가는 길목 내내 폭발적 속도로 상대를 압도했기 때문이다. 준준결승 1조에 나선 최민정은 경기장 내 전광판 오류로 혼란스러운 와중에도 가볍게 1위로 준결승에 올랐다. 준결승에선 마지막 3바퀴를 남기고 폭발적인 바깥쪽 추월로 순식간에 선두를 차지하며 12년 만에 올림픽 신기록(2분16초831)까지 새로 썼다.

▶2월 13일 오후 중국 베이징 캐피털 실내경기장에서 열린 2022 베이징동계올림픽 쇼트트랙 여자계주 3000m 결승전에서 은메달을 획득한 우리나라 쇼트트랙 대표팀이 금메달을 차지한 네덜란드, 동메달을 차지한 중국 선수들과 함께 기념 사진을 찍고있다. | 연합
최민정 폭풍질주 여자 쇼트트랙 1500m 2연패
2018 평창동계올림픽 때 무심한 표정으로 ‘얼음공주’라는 별명까지 얻었지만 이번 대회에선 울고 웃으며 더욱 뜨거운 올림픽을 치렀다. 우여곡절도 있었지만 드라마의 끝은 환한 미소였다.
최민정은 이날 경기가 끝난 뒤 기자들과 만나 “너무 좋아서 믿기지 않는다”고 말했다. 최민정은 “저뿐만 아니라 모든 선수가 같이 노력하면서 좋은 결과를 만들어내서 역시 쇼트트랙은 한국이라는 말을 지킬 수 있었던 것 같다. 응원해준 분들에게 감사하다”며 웃었다.
그러면서 “이번 대회 마지막 종목이기도 했고 2연패 도전이라는 점에서 생각하고 신경 쓸 게 있었는데 좋은 결과로 이어져서 더 기분 좋고 뿌듯하다”고 말했다. 그는 또 “평창올림픽 때는 처음이어서 힘들지만 잘 이겨냈다고 생각했다. 베이징 때는 경험이 생겨서 괜찮을 거라 생각했는데 역시 올림픽답게 생각 이상으로 힘든 것 같다”며 “어쨌든 마무리가 좋아서 다행”이라고 했다.
올림픽에서 메달 5개라는 고지에 오른 최민정의 다음 목표는 뭘까? 최민정은 “평창올림픽을 준비할 때도 베이징올림픽은 생각을 못 했다. 베이징을 준비할 때도 2026 밀라노동계올림픽은 생각을 못 했다”라며 “그 부분은 일단 좀 쉬면서 생각해봐야 할 것 같다”고 했다. 그는 또 “메달을 많이 땄는데 절대 저 혼자 잘해서 많이 땄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많이 딴 만큼 많은 분이 도와줬다. 도와준 모든 분께 감사를 드리고 싶다”고 전했다.
앞서 2월 13일 열린 쇼트트랙 여자 3000m 계주에서는 최민정, 김아랑(27·고양시청), 서휘민(20·고려대), 이유빈(21·연세대)이 4분 03초 627로 은메달을 목에 걸었다. 3회 연속 올림픽 메달이다.

▶최민정이 2월 16일 열린 쇼트트랙 여자 1500m 준결승에서 폭발적 속도로 상대를 압도하며 역주하고 있다.
남자 쇼트트랙 계주 5000m 값진 은메달
한편 황대헌(23·강원도청), 곽윤기(33·고양시청), 이준서(22·한국체대), 박장혁(24·스포츠토토), 김동욱(28·스포츠토토)으로 구성된 쇼트트랙 남자대표팀은 2월 16일 열린 남자 계주 5000m 결승전에서 막판 폭발적 질주로 6분 41초 679의 기록으로 은메달을 따냈다.
1500m 금메달리스트 황대헌은 곽윤기와 함께 막판 스퍼트를 이끌었고 1000m 준준결승에서 스케이트 날에 손등을 찢긴 박장혁은 부상 투혼을 발휘했다. 박장혁과 이준서 등은 첫 올림픽 무대에서 메달을 걸어 기쁨이 두 배였다.
분홍색 머리로 염색한 맏형 곽윤기는 이날 준결승 때와 마찬가지로 마지막 두 바퀴를 책임지면서 제몫을 다했다. 곽윤기는 이날 경기가 끝난 뒤 기자들과 만나 “아쉬운 건 사실”이라면서 “금메달만 보고 여기까지 준비를 했는데 거기까지 도달하지 못해서 너무 아쉽고 원래는 오늘이 ‘라스트 댄스’라며 은퇴를 앞두는 경기라고 마음먹었는데 오늘 아쉬운 경기를 하다 보니까 ‘은퇴를 해야 하나’라는 것도 고민하는 밤이 될 것 같다”고 했다. 이어 “국민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드린다는 말씀드리고 싶고 너무너무 훌륭한 후배들과 함께 한 시즌 보내서 정말 너무너무 행복하고 기쁜 올림픽이었다”는 말도 잊지 않았다.
그는 레이스 아쉬움에 대해선 “선두에서 달리고 있다가 제가 실수를 하는 바람에 두 번째로 밀려났고 레이스가 꼬이기 시작하면서 죄책감이 엄청 크다. 나머지 9바퀴 때 추월할 수 있는 상황에서 힘을 비축해서 마지막 승부를 보자는 생각에서 참았는데 그것을 해야 했다는 후회도 든다”고 했다.
시상대에서 그는 12년 전처럼 춤으로 자축 세리머니를 했다. 이번에는 그룹 방탄소년단(BTS)의 ‘다이너마이트’ 춤이었다. 이에 대해 곽윤기는 “사실 준비를 했다기보다는 평소에 방탄소년단의 팬이다. 또 올림픽 초반에 편파 판정도 그렇고 그런 부분이 저희한테 아주 힘들었는데 RM님의 위로를 받고 어떻게든 보답을 해드려야겠다는 마음에 했다”고 전했다.
이날 금메달과 은메달을 추가한 우리나라 쇼트트랙은 양궁(24개)을 넘어 다시 최다 금메달(25개) 종목이라는 영예를 안았다. 대회 초반 편파 판정 논란 등으로 위기를 겪기도 했지만 결국 ‘쇼트트랙은 역시 한국’은 물론 ‘한국은 역시 쇼트트랙’이라는 말까지 모두 입증한 셈이다.

▶차민규가 2월 12일 중국 베이징 국립 스피드스케이팅 경기장에서 열린 남자 500m 경기에서 은메달을 차지한 뒤 기뻐하고 있다. | 연합
차민규 스피드 남자 500m 2연속 은메달
‘불굴의 사나이’ 차민규(29·의정부시청)가 2월 12일 남자 스피드스케이팅 500m에서 34초 39를 기록하며 올림픽 두 대회 연속 은메달을 일궜다. 올림픽 남자 500m 스프린트에서 연속 메달을 획득한 이는 국내에서 차민규가 처음이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그에게 밀려온 것은 금메달을 따지 못한 안타까움이었다.
차민규는 경기 뒤 국제빙상경기연맹(ISU)와 한 인터뷰에서 “평창 대회에서는 나도 은메달을 딸 줄 몰랐다. 이번 대회에서는 달랐다. 금메달을 따기 위해 열심히 노력했다. 우승하지 못해 아쉽다”고 말했다.
차민규는 이날 100m까지 9초 64를 기록했지만 두 개의 코너를 돌아야 하는 나머지 400m 구간 랩타임(24초 75)에서는 30명 중 1위였다. 쇼트트랙에서 전향한 그가 주행에서 세계 최고의 수준이라는 것을 보여준 것이다.
1위를 차지한 중국의 가오팅위(34초 32)와는 0.07초 차이가 난다. 평창에서는 0.01초 차이로 은메달을 땄어도 쿨하게 넘어갔지만 이번 대회에서는 미련이 남는다.
차민규는 올 시즌 월드컵 랭킹 11위로 10위 밖에 있었다. 월드컵 1차 대회 첫 레이스에서 18위에 그치면서 2부 리그로 밀려나기도 했다. 발목이나 골반이 좋지 않았고 스케이트 날 등 장비 관리에서도 어려움을 겪었다. 제갈성렬 의정부시청 감독은 국내 언론과 한 인터뷰에서 “차민규는 골반 부상으로 인한 재활과 보강 치료 때문에 정상적인 훈련을 소화하기 힘들었다. 장비 문제가 생기면서 절망적인 상황에 놓이기도 했다”고 말했다. 이런 까닭에 한국 선수단에서도 차민규의 입상을 기대하지 않았다.
하지만 정신력이 강하고 자기관리에 철저한 차민규는 불굴의 투지로 몸을 만들었다. 특히 장비 문제에서 해결책을 찾으면서 자신감을 충전했다. 차민규가 베이징으로 출발하기 전 두 세트의 스케이트 날을 챙겨준 장철 전 평창겨울올림픽 한국팀 장비코치는 “대회 직전에도 영상 통화로 서로 장비 점검을 해왔다”고 밝혔다.
장철 코치가 해준 일은 세 가지다. 첫째 차민규의 스케이트 슈즈와 날을 선수의 체형과 주행 습관에 맞게 중심선을 최적화하도록 맞춰주었다. 코너를 돌 때 원심력을 활용하도록 날을 휘어주는 벤딩 기술도 노하우를 필요로 하는 일이다. 마지막으로 스케이트 날의 바닥을 갈아주는 데도 도움을 주고 있다. 날이 얼음에 닿는 부분이 선수마다 앞이나 가운데, 뒤 쪽 등 특정 부분에 치우쳐 있고, 얼음 상태에 따라서도 방법을 달리해야 하기 때문이다.
장 코치는 “센터를 맞춘 것은 고정돼 있고 벤딩은 미세하게 풀어질 수 있지만 어쩔 수 없다. 날은 현장 상황에 맞게 영상통화를 통해 선수가 직접 갈고 있다”고 설명했다. 현지의 코치진도 최선을 다해 대표선수들을 돕고 있지만 선수마다 장비 특성이 제각각이기 때문에 요구를 다 맞춰줄 수가 없다. 제갈성렬 감독이 “만약 지난해 말 월드컵 시리즈 때부터 완벽한 장비로 경기에 임했다면 더 좋은 성적을 냈을 것”이라고 말한 이유다.
이준희 <한겨레>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