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방부는 6·25전쟁으로 숨지거나 실종된 우리 군인을 16만여 명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 가운데 전쟁 중 가족에게 유해가 전해진 군인은 2만 9000여 명. 2000년부터 시작된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이하 국유단)의 유해 발굴을 통해 1만여 구를 찾았고, 이들 중 신원이 확인된 128명을 가족의 품으로 돌려보냈다. 하지만 아직까지도 찾지 못한 12만 명의 유해가 산야에 묻혀 있다. 국유단은 ‘단 한 명의 전우도 전장에 남겨두지 않는다’는 신념으로 지금까지 유해 발굴을 이어오고 있다. 유해 발굴 사업은 크게 조사·탐사→발굴→감식→추모행사의 네 단계로 나뉘는데 탐사부터 발굴까지 대부분의 과정이 산중턱이나 정상에서 이루어진다. 당시 전투가 높은 곳을 선점하는 고지전이었기 때문에 많은 유해가 산속에 묻혀 있다. 때문에 남편을 발견했다는 말에 여든이 넘은 할머니가 산 정상까지 업혀 올라오는 일도 있었다.
웅크린 유해를 보고 오열하는 초로의 여인은 우리 현대사의 가슴 아픈 상징으로 남았다.
이학기 유해발굴감식단장은 80대가 된 여동생이 오빠의 유해를 감싼 태극기를 어루만지며 “오빠, 60년이 넘었지만 이렇게 돌아와줘서 고마워요”라며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보면서 미발견 유해에 대한 결의를 다지게 된다고 말한다.

▶ 유해발굴감식단이 설악산에서 발굴 유해 약식제례 후 유해를 봉송하는 모습 ⓒ국방부
발견되는 유해마다 절절한 사연으로 가득하다. 2017년 7월 강원 인제군 서화면 서화리 무명 900고지 일대에서 발굴된 김창헌 일병은 당시 임신 중인 아내를 두고 전장으로 떠난 사연이 있다. 아내 황용녀 씨는 “남편은 복중의 아이를 남자로 생각해 ‘김인석’이라는 이름을 지어주고 전쟁터로 떠났고, 10일 후 딸이 태어났다”며 “남편이 소중히 지어준 아이의 이름을 바꿀 수 없어 딸에게 그대로 지어줬다”고 했다. 김 일병의 딸 김인석(67) 씨는 2008년 6월 국군수도병원에서 유전자 시료를 채취해두었는데, 유해가 발견된 뒤 정확한 신원확인 검증을 위해 유전자 시료를 추가로 채취해 부녀 관계로 확인된 감정결과를 받을 수 있었다. 황 씨는 “남편이 떠난 후 보따리 장사와 노점상을 하며 홀로 딸을 키웠는데, 이제라도 남편의 유해를 찾을 수 있어서 너무나 감격스럽다”는 소감을 밝혔다.
반세기 지나 집으로 돌아온 유해
북미 공동 유해 발굴 과정에서 발견되는 유해도 있다. 가장 최근에 발견된 고(故) 윤경혁 씨는 인천상륙작전 이후 중공군이 참전하면서 유엔군이 남쪽으로 철수하던 1950년 11월 말쯤 숨진 것으로 추정된다. 평안남도 개천 지역에 묻혀 있던 그의 시신은 2001년 북미 공동 유해 발굴 과정에서 미군 유해와 섞여 발굴됐다. 전쟁 당시 미군 1기병사단(카투사)에 배치된 탓이다. 그의 유해는 하와이에 있는 미 국방부 산하 전쟁 포로 및 실종자 확인국(DPAA)으로 보내졌다가 정밀 감식을 통해 한국 국방부로 인계되면서 밝혀졌다. 다행히 윤 일병의 아들인 윤팔현(68) 씨가 7년 전 지역 보건소에 채취해둔 유전자 시료와 일치하면서 가족을 찾을 수 있었다. 윤 씨는 “시료채취 후 발굴된 유해 중 일치하는 유전자가 없어 기약 없는 기다림의 시간을 보내야 했지만, 지난 5월 꿈에 그리던 아버지의 유해가 하와이에 있다는 소식을 접했다”고 말했다. 국유단은 유해 송환에 앞서 6월 19일 윤 씨의 자택을 방문해 전사자 신원확인 통지서와 국방부 장관 위로패 등을 전달하는 ‘호국의 영웅 귀환 행사’를 가졌다. 윤 일병 유해는 7월 한미 6·25 전사자 유해 상호 송환 행사를 통해 약 1만 5000㎞의 귀향길을 거쳐 한국으로 돌아올 예정이다.
시료채취, 신원확인 가장 결정적인 단서
2000년 시작된 국군 전사자 유해발굴사업이 올해로 18년째를 맞았다. 6·25전쟁 50년 기념사업의 하나로 시작됐다가 경북 칠곡군 다부동 328고지에서 많은 유해가 발굴되면서 사업을 계속 추진하자는 공감대가 형성돼 지금에 이르렀다. 유해 발굴은 문화재 발굴과 유사한 면이 많지만 보다 신중하게 이뤄진다. 유골 손상을 막기 위해 중장비는 물론 문화재를 찾는 데 사용하는 탐침도 절대 사용하지 않는다. 따라서 한 구의 유골을 수습하는 데만 네다섯시간을 훌쩍 넘긴다. 유해발굴단을 가진 나라는 미국과 우리나라 두 곳뿐인데, 발굴과 수습, 신원확인 등 전 과정을 독자적으로 수행하는 세계 최고의 기술력을 갖추고 있다. 발굴에도 육·해·공군과 특전사 등 200여 명의 장병과 발굴·감식에 전문 지식을 갖고 있는 고고학, 법의학, 방사선학 등의 전공자들로 구성돼 있다. 이들은 산야 어딘가에 잠든 12만 호국 용사들을 가족의 품으로 돌려보내기 위해 매일 1000m 고지를 오른다. 유해는 주로 ‘생토층(한 번도 파헤친 적이 없는 원래 그대로의 땅)’에서 발견되는데, 반세기가 넘는 시간이 지나 넓적다리뼈, 정강뼈, 위팔뼈, 발가락뼈 등의 잔해로 남아 있는 것이 대부분이다.
이런 이유에서 신원을 찾을 수 있는 가장 확실하고 빠른 방법은 유가족의 유전자 시료채취다. 과거에는 채혈을 통해 DNA를 채취했지만, 2011년부터는 구강 내 상피세포 채취 방법으로 쉽고 간단하게 바뀌었다. 가족 중에 6·25전쟁 전사자가 있다면 거주지 인근의 보건소나 군 병원, 예비군동대에서도 시료채취가 가능하다. 거동이 불편할 때는 기동탐문담당이 직접 가정을 방문하기도 한다. 시료채취는 직계가족뿐만 아니라 친·외가 8촌까지 가능하며 참여 시 무료건강검진까지 제공된다. 현재 유전자 시료채취에 동참한 유가족은 약 4만여 명으로 6·25전쟁 이후 수습된 유해의 24%에 불과하다. 20세기 초부터 개인의 의료 기록과 치과 기록을 보유한 미국과 달리 우리는 유해만으로 신원을 밝힐 수 있는 근거 기록이 거의 없어 유가족의 DNA를 확보하는 게 관건이다.
하지만 6·25전쟁이 발생한 지 68년이 넘으면서 유가족의 유전자 공여만 기다릴 수 없는 상황이다. 전사자 가족들이 70~80세 이상의 고령에 결혼을 하지 않은 청년들이 참전하면서 2세가 없는 경우도 많기 때문이다. 유해 매장 지역을 알려줄 제보자들 역시 줄고 있고 국토 개발이 진행되면서 유해 매장 지역 가운데 상당수가 훼손될 가능성도 커지고 있다. 이학기 유해발굴감식단장은 “유해발굴사업은 목숨 바쳐 대한민국을 지켜낸 호국 영웅들을 국가가 끝까지 책임진다는 약속”이라며 “앞으로도 조국을 위해 헌신하신 영웅들을 가족의 품에 모실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다짐했다.
남북 비무장지대(DMZ) 유해발굴한다

ⓒ연합
현충일을 맞아 국립대전현충원을 찾은 문재인 대통령은 “남북 관계가 개선되면 비무장지대(DMZ)의 유해 발굴을 우선적으로 추진하겠다”며 “미군 등 해외 참전용사들의 유해도 함께 발굴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문 대통령은 추념식에서 “6·25 전쟁에서 전사한 군인과 경찰의 유해 발굴도 마지막 한 분까지 계속해나갈 것”이라며 이같이 밝혔다. DMZ에서 전사한 국군은 약 1만 명, 미군은 2000여 명으로 추정되며 이에 못지않은 숫자의 북한군도 숨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행사에 앞서 현직 대통령으로는 처음으로 6·25 때 전사한 김기억 육군 중사 등이 묻힌 무연고 묘지도 참배했다. 문 대통령은 “국가가 국민에게 드릴 수 있는 믿음에 대해 생각했다”며 “대한민국은 결코 그분들을 외롭게 두지 않을 것이다. 끝까지 기억하고 끝까지 돌볼 것”이라고 말했다.
남북 정상은 지난 ‘4·27 판문점 선언’에서 적대행위의 종식을 통한 비무장지대의 실질적인 평화지대에 합의한 바 있다. 여기에 북·미 비핵화 회담과 맞물려 65년 만의 종전선언이 추진되는 가운데 남북 공동 유해 발굴 추진은 4·27 판문점 선언에서 DMZ를 실질적인 평화지대로 만들겠다는 의도로 해석된다.
강보라│위클리 공감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