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8년 커다란 캐비닛 크기의 슈퍼컴퓨터는 30년이 지난 지금 전용 건물에서 운영될 정도로 비대해졌다. 비단 크기뿐 아니라 그 성능도 엄청나게 월등해졌다. 국내에 첫 도입된 슈퍼컴 1호기 ‘Cray-2S’는 초당 20억 번의 연산이 가능했다면 최신 5호기 ‘누리온’은 초당 2경 5700조 번(이론 성능 기준) 연산하니, 비교하기가 머쓱한 성능 차이를 보여준다. 우리나라 슈퍼컴퓨터가 30년 동안 비약적인 성장을 거듭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은 이유다.
누리온은 11월 12일(현지 시각) 미국 댈러스에서 열린 ‘슈퍼컴퓨팅콘퍼런스(SC) 18’에서 세계 슈퍼컴퓨터 성능 순위 13위에 이름을 올렸다. 국제슈퍼컴퓨터학회(ISC)는 매년 6월, 슈퍼컴퓨팅콘퍼런스(SC)는 11월 전 세계 슈퍼컴퓨터의 계산속도, 전력 효율을 평가해 성능이 뛰어난 컴퓨터 1위부터 500위를 발표한다. 관련 평가는 정해진 연산 처리 프로그램을 가동했을 때 측정되는 실측 성능(처리속도)을 비교하는데 통상적으로 실측 성능은 이론 성능의 50~70% 수준이다. 누리온의 경우 이론 성능은 25.7페타플롭스(PFlops), 실측 성능은 13.93페타플롭스를 기록했다. 1위인 미국 슈퍼컴퓨터 ‘서밋(Summit)’의 실측 성능(143.5페타플롭스)과 견준다면 한참 뒤처진다고 평가할 수 있지만 국내 슈퍼컴퓨터 변천사만 놓고 보면 진화가 계속돼온 셈이다.
1988년 서울올림픽이 열렸던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해 8월 시스템공학연구소(SERI)는 미국 제조사 크레이에서 국가 슈퍼컴 1호기를 구입했다. 당시 구입가는 2400만 달러, 한화로 약 273억 원에 달했다. 1호기는 중앙처리장치(CPU) 4개, 메모리 용량 1GB, 디스크 용량 40GB를 갖췄고 최고 성능이 2기가플롭스(GFlops)였다.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개인용 컴퓨터 성능에도 못 미치는 건 당연하고 한 손에 쥐고 있는 스마트폰 메모리 용량보다 훨씬 아래다.
그럼에도 대학과 국공립연구소, 기업체 등 60여 곳이 1호기를 기상예보, 대륙붕에서의 석유 탐사,신약개발 등 분야 연구에 활용함으로써 국내 기초연구와 첨단 산업기술·신제품 개발의 성과를 이뤘다. 이를테면 대우자동차는 시속 50km로 전진하는 대차가 차량 측면에 충돌할 때 승객에 미치는 영향을 연구했고, 한국자원연구소 석유해저연구부는 지하 지질구조를 정밀하게 규명해 석유 부존 가능 지역 탐지 기술을 개발했다. 특히 국산 자동차 설계 및 제작에 컴퓨터 시뮬레이션이 적용됐다는 데 큰 의미가 있다. 시뮬레이션은 컴퓨터 안에서 실제와 거의 똑같은 가상의 상황을 만들어 모의실험을 하는 것을 뜻한다. 신차를 제작하려면 시제차 충돌 실험을 거쳐야 하는데 이때 사용되는 더미인형 값만 수억 원이다. 몇 차례 실험하다 보면 오랜 시간과 많은 비용이 소요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슈퍼컴 시뮬레이션을 시작하면서 시간과 비용을 줄이고 정확성을 높일 수 있게 됐다는 평가다.
5년 내 국내산 슈퍼컴퓨터 등장 전망
1호기는 도입 이후 5년이 지난 1993년 10월, 2호기 ‘Cray-C90’ 구축과 동시에 퇴역했다. 2호기의 최고 성능은 16GFlops로 탑재된 CPU 16개, 메모리 용량 4GB, 디스크 용량 203GB였다. 2호기는 8년가량 사용됐으며 액체로켓 엔진의 분무 연소 해석, 장마와 관련한 호우·태풍 분석 등의 연구 성과를 거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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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6월과 2002년 1월, 두 차례에 걸쳐 도입된 3호기는 IBM의 p690, NEC SX-5/SX-6 시스템이었다. 이론 성능은 2호기에 비해 대폭 늘어난 4.3테라플롭스(Tflops)에 달했다. 장착된 CPU 또한 42배 늘어난 672개, 메모리 용량은 4.4TB, 디스크 용량은 110TB였다. 3호기는 중소기업 기술 혁신에 활용돼 슈퍼컴의 대중화를 이루는 계기가 됐다. 구체적으로 화학·항공·물리 등의 분야에 이바지했는데 눈에 띄는 성과는 기존 알루미늄과 종이를 쓰던 환기장치용 배기열 회수 열교환기를 플라스틱 소재로 바꾸는 데 일조한 것이다.
4호기는 2010년 11월에 구축됐고 3호기보다 80배 정도 성능이 향상된 324Tflops를 기록했다. 이 슈퍼컴은 중력파, 분자모델링, 나노 소재 개발과 같은 거대 연구의 발전을 견인했다.
그렇다면 5호기는 어떠한가. 무게만 무려 133톤(13만 3000kg)에 달하며 5호기가 들어선 공간의 면적은 468m²(141.57평)다. 이 공간에 들어서면 거센 바람과 다소 서늘한 기운이 느껴지는데 이는 시스템에서 발생하는 열을 식히기 위함이다. 이식 KISTI 슈퍼컴클라우드센터장은 “열이 조금 나면 컴퓨터 내부 팬으로 식힌다지만 슈퍼컴퓨터는 어림없다. 냉수가 건물 밖에서 컴퓨터 안으로 들어와서 뜨거워지면 외부로 다시 나가고 식혀서 또다시 들어오는 방식이다. 액체로 열을 뺏는 셈이다”라 고 설명했다. 매일 사용되는 냉수는 1237만 3920ℓ, 3만 7000명의 1일 식수량이다.
우리나라는 평균 5~8년 주기로 최신 슈퍼컴퓨터를 들여왔다. 개인용 컴퓨터도 일정 기간 지나면 더 좋은 성능의 제품이 등장하듯 슈퍼컴 도입 또한 같은 이유다. 전력 소비를 최소화하고 최고 기량을 낼 수 있는 컴퓨터로 더 나은 연구 환경을 마련하겠다는 것. 다만 국내에서 자체 개발한 슈퍼컴퓨터가 없다는 점에서 늘 아쉬움이 따른다. 이식 센터장은 “국내 슈퍼컴퓨터 시장이 작다 보니 우리는 자체 개발과 구매 중 후자에 탄력을 받은 게 사실”이라면서도 “슈퍼컴퓨터 개발을 향한 정부 의지가 강해 앞으로가 기대된다”고 말했다.
지난 2월 정부가 발표한 ‘제2차 국가 초고성능 컴퓨팅 육성 기본계획’에 따르면 슈퍼컴퓨팅 인프라가 확보될 전망이다. 정부는 초당 1000조 번 연산이 가능한 페타플로스급 슈퍼컴퓨터를 5년 안에 우리 손으로 만들겠다는 계획이다. 이를 위해 초고성능컴퓨팅(HPC) 활용을 확대하고 국가 초고성능컴퓨팅 자원 확보 로드맵을 수립하며, 차세대 컴퓨팅 기술 대응을 위한 전문가 포럼 운영 및 양자컴퓨팅 연구개발을 추진하기로 했다.
플롭스(Flops)란?
슈퍼컴퓨터 성능을 이야기할 때면 플롭스(Flops)라는 단어가 빠지지 않는다. 플롭스는 슈퍼컴이 1초에 수행할 수 있는 연산수로, 계산속도를 나타내는 단위로 이해하면 된다. 느린 순으로 메가플롭스(MFlops)부터 기가플롭스(GFlops), 테라플롭스(TFlops), 페타플롭스(PFlops)다.
초당 100만 번 연산한다면 메가플롭스, 10억 번 연산하면 기가플롭스, 1조 번 연산하면 테라플롭스, 1000조 번 연산하면 페타플롭스다.
자료│<슈퍼컴퓨터가 만드는 슈퍼대한민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