컴퓨터는 똑똑하다. 너무 당연한 이 이야기를 조금 다르게 해본다. 개인용 컴퓨터는 사람보다 더하기·빼기·곱하기·나누기를 2조 배쯤 잘한다. 확실히 똑똑하다. 그렇다면 ‘대단한’, ‘굉장히 좋은’이라는 의미의 슈퍼(super)를 붙인 슈퍼컴퓨터는 얼마나 더 똑똑할까. 과학자들의 말을 빌리면 개인용 컴퓨터보다 수천 배 이상 빠른 연산속도를 과시한다. 슈퍼컴퓨터는 말 그대로 ‘매우 성능이 뛰어난 컴퓨터’다.
슈퍼컴퓨터(이하 슈퍼컴)는 방대한 양의 데이터를 가장 신속하고 정확하게 처리한다. 이는 4차 산업혁명 분야의 핵심 인프라로 꼽히는 이유이자 미국과 중국, 일본 등 세계 여러 나라가 최신형 슈퍼컴 개발 및 도입에 열을 올리는 배경이다. 우리나라도 예외는 아니다. 우리나라는 올해로 슈퍼컴을 도입한 지 30년째를 맞았고 12월 3일 5호기 정식 가동을 앞두고 있다.
지난 11월 7일 과학기술정보통신부(과기정통부)와 한국과학기술정보연구원(KISTI)은 ‘국가 초고성능컴퓨터 5호기 개통식 및 도입 30주년 기념식’을 열었다. KISTI는 1988년 국가 기관 최초로 슈퍼컴퓨터를 도입했다. 이후 평균 5~8년마다 슈퍼컴퓨터를 도입하고 있는데, 이번 5호기는 1호기와 비교하면 1300만 배의 성능을 갖췄다.

▶ 한국과학기술정보연구원 관계자들이 슈퍼컴퓨터 5호기를 둘러보며 이야기하고 있다. ⓒC영상미디어
최희윤 KISTI 원장은 환영사에서 “서울올림픽이 열리던 역사적인 그해에 슈퍼컴퓨터가 국내에서 처음 가동됐다”며 “당시 1호기는 2기가플롭스(GFlops, 슈퍼컴 계산 속도를 나타내는 단위) 속도에 메모리 1GB, 디스크 용량 40GB에 지나지 않은 지금의 PC보다도 한참 낮은 성능이었지만 그 파급 효과는 대단했다”고 회고했다. 그는 “1호기 덕분에 슈퍼컴퓨터를 기반으로 한 과학적인 기상예보가 국내에서 시작됐고 국산 자동차의 설계와 제작에 컴퓨터 시뮬레이션이 적용됐으며, 한국형 원자로의 안전성 검증에도 슈퍼컴퓨터가 활용됐다”며 “오늘부로 제5호 국가 슈퍼컴퓨터인 누리온의 새 시대가 열렸다”고 말했다.
‘누리온’으로 이름 붙여진 5호기는 2018년 11월 기준 세계 성능 순위 13위에 올랐다. 이론상 성능은 25.7페타플롭스(PFlops, 슈퍼컴 계산 속도를 나타내는 단위)로 1초에 2경 5700조 번의 부동 소수점 연산이 가능하다. 지구 전체 인구 70억 명이 420년 동안 할 계산을 1시간 안에 마칠 수 있는 수준이다.
누리온의 전신인 1~4호기는 국산 자동차 설계에 사용돼 우리나라가 자동차 강국으로 도약하는 계기를 마련했고, 액체 로켓 엔진 시뮬레이션, 우주 진화 과정 연구 등을 뒷받침해왔다. 특히 4호기는 2011년부터 지금까지 연구자 1만여 명과 기업 500여 곳에서 사용했고 기업의 신제품 개발 비용과 시간을 각각 78%, 61% 줄이는 효과를 거뒀다. 구체적으로 김동호 연세대 교수는 현대 화학에서 중요한 물성의 하나인 분자 방향성의 역전현상을 슈퍼컴 양자 계산으로 입증했다. 김관표 UNIST 교수·이훈경 건국대 교수는 그래핀 박막 위에서 머리카락보다 얇은 극미세선이 자라는 것을 관측하고 슈퍼컴을 통해 이를 증명했다. 기업 바우드는 슈퍼컴의 고속 시뮬레이션 능력을 바탕으로 고화질 동영상 촬영용 액션캠 ‘Flex PIC cam’을 개발했다.
초거대 연구, 국가·사회 현안 해결 전망
4호기에 비해 70배 향상된 능력을 보유한 누리온의 역할에 기대감이 몰리는 건 이 때문이다. 누리온은 그동안 장비 한계에 부딪혔던 영역의 연구를 가능하게 할 것이라는 전망이다. 우주의 기원을 밝히는 기초연구, 세포 간 연결을 1000억 개 원자 수준으로 분석하는 연구 등이 대표적이다. 기업의 신제품 개발과 시장 분석, 자연재해, 교통문제 등 국가·사회 현안 해결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KISTI는 부처나 공공기관 임무 수행, 중소·중견기업 디지털 혁신 등 국가적으로 추진하는 정책과제에 누리온을 적용함으로써 국가 주요 공공재로서 슈퍼컴퓨터의 역할을 확대한다는 계획이다.

과기정통부가 발표한 5호기 운영계획안에 따르면 누리온은 국가 대형 연구 장비인 점을 감안해 최대한 무상 사용을 원칙으로 하되 사용자가 신속한 사용을 원하는 경우 유상으로 지원한다. 누리온을 활용해 우수 연구 성과를 낸 연구자에게는 지원 과제 수 확대와 같은 인센티브를 제공하는 예정이다. 무엇보다 빅데이터 처리와 인공지능(AI) 분야에서 수요가 높은 소프트웨어 등 맞춤형 환경을 제공하고 클라우드 기술로 사용자가 원하는 컴퓨팅 환경을 구축할 수 있도록 지원해 관련 분야 전문지식이나 경험이 부족한 중소기업·개인 연구자 등도 쉽게 활용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이진규 과기정통부 차관은 “인간의 지식이나 노동력 대신 데이터가 부를 창출하는 데이터 경제 시대에 진입하면서 슈퍼컴퓨터가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고 미래 경쟁력을 확보하는 데 핵심 역할을 할 것”이라며 “5호기의 활용 분야를 넓히고 경쟁력 확보에 필요한 분야나 사회 현안 과제를 적극 지원할 예정”이라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