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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가에서 정착된 우리말
여러분은 ‘날적이’를 아시나요? 날적이는 ‘날마다 적는다’는 뜻으로 일기의 순우리말 표현입니다. 요즘은 어린이집이나 유치원에서 교사와 부모가 아이들의 하루 생활을 글로 적어 주고받는 수첩으로 알려져 있죠. 아이가 유치원과 가정에서 하루하루 살아가는 모습이 담긴 성장일지로 두세 줄 정도 형식적인 기록에 그치는 알림장보다 아이들의 삶을 총체적으로 이해하고 지속적으로 변화시켜나갈 수 있다는 장점이 있는데요.
하지만 필자가 기억하는 날적이는 다릅니다. 20여 년 전 대학 시절 과방에 있던 ‘날마다 끄적이는 노트’로 그날 있었던 일들을 글이나 그림으로 나누고 공유하던 일종의 문화였습니다. 1980년대 이후 태어난 세대들은 디지털의 발달로 미니홈피 등이 그러한 공유 문화를 대체했기 때문에 생소하게 느껴질 텐데요. 심지어 누리소통망(SNS)이 발달한 요즘에 날적이 문화는 상상조차 할 수 없을 겁니다.
그러나 1990년대에만 해도 연락할 수단이 유선전화와 무선 호출기(삐삐) 등에 불과했고 이를 공유할 온라인 가상 공간도 거의 없었기 때문에 그 당시 대학생들은 과방에 날적이를 두고 일기를 교환했습니다. 평범한 의사전달뿐 아니라 부조리한 세상에 대한 비평, 외로움을 토로하는 글 등을 통해 같이 고민하고 마음을 털어놓는 등 낯선 세상에 적응하는 과정을 함께 나눈 유일한 소통창구였는데요.
시대의 거울 ‘날적이’
몇 해 전 이한열 열사가 활동한 연세대학교 동아리 ‘만화사랑’이 1987~1996년 작성된 날적이 30여 권을 이한열기념관에 기증했다는 반가운 소식이 들렸죠. 기증된 날적이에는 이한열 열사의 비극에 대한 안타까움, 시국에 대한 대학생들의 분노가 담겨 있었는데요.
그 전엔 성균관대학교 정문 앞에 있던 카페 ‘창고’에서 보관하던 434권의 날적이를 성균관대 학술정보관 교사자료실에 전달해 화제를 모았습니다. 여기에는 시대적 고민에서 소소한 일상까지 당시 학생들의 모습이 가감없이 기록돼 있었는데요. ‘날적이는 그 시대의 거울’이라는 말을 실감하며 1990년대 날적이 문화를 다시금 떠오르게 했습니다.
이렇게 날적이처럼 20여 년 전 대학가에서 쓰던 우리말이 요즘에도 잘 사용된다니 반가운 마음인데요. 이런 단어는 또 있습니다. 대표적인 게 ‘모꼬지’인데요. 새 학기가 시작되면 대학에서는 학과나 동아리별로 단합대회를 합니다. 특히 봄기운이 물씬 풍기는 4월에 모꼬지를 많이 떠나는데요. 바야흐로 모꼬지의 계절입니다.
모꼬지는 ‘놀이나 잔치 또는 그 밖의 일로 여러 사람이 모이는 일’을 뜻하는 순우리말입니다. 홍윤표 연세대 명예교수에 따르면 모꼬지는 ‘모이고 갖추는 일’ 즉 ‘모임을 갖추는 일’을 뜻하는 ‘?고지’가 음운변화를 일으켜 여러 단계의 형태로 나타나다가 오늘날 모꼬지로 정착한 것인데요.
모꼬지는 1980년대 이후 대학가에서 들불처럼 번진 우리말 사랑 운동에 힘입어 표제어에 오른 이후 ‘엠티’를 대신하는 말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영어 ‘멤버십 트레이닝(Membership Training)’의 앞글자를 딴 엠티는 사실 영미권 국가에선 쓰지 않는 단어로 우리나라에서 관습적으로 사용되는 ‘콩글리시’입니다.
‘동아리’ ‘새내기’ ‘뒤풀이’ ‘새터’
‘동아리’ ‘새내기’ ‘뒤풀이’도 있습니다. 각각 ‘서클’ ‘신입생’ ‘애프터’를 밀어내고 대학가 용어로 정착했는데요.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에 따르면 동아리는 ‘같은 뜻을 가지고 모여서 한패를 이룬 무리’, 새내기는 ‘대학이나 직장 등에 새로 갓 들어온 사람’, 뒤풀이는 ‘어떤 일이나 모임을 끝낸 뒤에 서로 모여 여흥(餘興)을 즐김. 또는 그런 일’을 말합니다.
‘새내기 배움터’를 줄인 말인 ‘새터’도 우리 귀에 익은 ‘오리엔테이션’을 대신하고 있는데요. 새터는 ‘대학 신입생의 학교생활 적응을 위한 예비 교육의 장’을 뜻하는 말로 준말을 적절하게 이용한 점이 돋보입니다.
① 나 리포트 쓸 게 벌써 쌓여 있어. 나도… 심지어 하나는 데드라인이 내일인데.
② 나 보고서 쓸 게 벌써 쌓여 있어. 나도… 심지어 하나는 마감일이 내일인데.
언어문화 개선을 위한 홍보 등 사회활동을 하는 ‘우리말가꿈이’가 최근호에서 과제나 시험, 모임 활동 등 대학 생활을 하면서 사용하는 외국어를 우리말로 써보자는 제안을 해 관심을 끌었는데요. 어떤가요? 우리말로 바꾼 ②가 훨씬 자연스럽지 않나요?
20여 년 전 낯설었던 새내기, 동아리 등의 우리말이 이젠 대학 생활의 ‘설렘의 대상’을 표현하는 말이 됐듯이 일상생활에서 사용하는 이런 우리말들이 더이상 어색하지 않은 날이 오기를 바라봅니다.
백미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