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로연극인들을 위해 만든 ‘늘 푸른 연극제’가 올 해는 ‘그래도, 봄’이라는 주제로 정욱, 손숙, 유진규, 기주봉, 윤문식 등 다수의 원로배우가 출연 중이다.│페이스북
영화나 드라마와 달리 연극은 배우의 힘이 중요하다. 현장의 조그마한 실수까지 드러나는 무대 특성상 젊은 패기만으로는 관객을 사로잡는 무대를 만들어 갈 수 없다. 최근 들어 평생 동안 연극무대를 지켜온 원로배우들이 화제의 중심에 오르고 있다. 원로배우들이 주인공으로 나오는 연극에도 관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원로배우들의 무대에 대중적 관심을 불러온 계기는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오징어 게임>으로 미국 골든글로브에서 남우조연상을 받은 배우 오영수(77)였다. 당시 연극 <라스트 세션>에 출연 중이던 그는 수상 소식이 알려진 뒤에도 무대를 지키면서 밀려오는 광고출연 제안도 거절하는 등 대배우답게 의연한 자세를 보였다.
오영수는 연기 경력만 무려 56년째로 영화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2003), 드라마 <선덕여왕>(2009)에 출연하면서 대중들에게 얼굴을 알렸지만 평생 동안 주로 연극무대를 지켰다. 1987년부터 23년간 국립극단 단원으로 활동하면서 동아연극상, 백상예술대상 연기상 등을 수상하기도 했다.
오영수·신구·이순재·박정자의 묵직한 연기
오영수의 묵직한 연기가 일품인 연극 <라스트 세션>은 연일 매진을 기록하면서 연장공연을 결정해 3월 20일까지 서울 종로구 대학로 TOM 1관에서 공연한다. 이 연극에서 오영수와 함께 더블 캐스팅 돼 프로이트 역을 맡은 신구(85) 역시 대학로를 대표하는 원로배우다.
신구는 90분간 주인공 두 명이 이끌어가야 하는 이 연극에서 엄청난 대사량을 소화하면서 노익장을 과시하고 있다. 그는 평생에 걸쳐 대학로를 지키면서 <파우스트>, <문제적 인간 연산>, <리어왕> 등에서 메소드 연기를 선보여온 최고의 배우다.
원로의 저력을 만천하에 알린 또 한 명의 배우는 이순재(87)다. 그는 2021년 말 막을 내린 <리어왕>에서 주인공으로 열연하면서 연기 인생 65년의 저력을 과시했다. 역대 리어왕 중 최고령이라는 타이틀을 거머쥐면서 혼자서 두 달여에 걸쳐 리어왕 역을 소화했다. 특히 200분이라는 공연시간을 혼자서 소화한 체력은 두고두고 회자될 만하다. 전석이 매진되는 흥행 기록을 세우면서 연극이 막을 내렸고 그가 주도적으로 앙코르 공연을 추진할 정도로 여전히 열정적이다.
여배우 중에서 꾸준하게 무대를 지켜온 이는 단연 박정자(79)다. 그는 최근 막을 내린 뮤지컬 <빌리 엘리어트>에서 발레리노를 꿈꾸는 탄광촌 소년의 할머니로 출연해 춤과 노래 솜씨를 과시했다. 그는 기자회견장에서 “90세까지 뮤지컬 무대에 서겠다”면서 “언제든지 필요하면 불러달라”고 말하기도 했다. 2021년에도 연극 <해롤드와 모드>에 출연하면서 녹슬지 않는 연기 열정을 보여준 바 있다.
▶역대 리어왕 중 최고령이라는 타이틀을 거머쥔 이순재는 200분이라는 공연시간을 혼자서 소화했다.│예매처
▶오영수의 묵직한 연기가 일품인 연극 <라스트 세션>은 연일 매진을 기록하면서 연장공연 중이다.│예매처
원로배우 위한 무대 ‘늘 푸른 연극제’
2022년 여섯 번째 시즌을 맞은 ‘늘 푸른 연극제’(2월 17~27일)는 우리나라 연극계에 이바지한 원로연극인들을 위해 만든 무대다. ‘그래도, 봄’이라는 주제로 열리며 정욱, 손숙, 유진규, 기주봉, 윤문식 등 다수의 원로배우가 출연 중이다.
배우 정욱(83)이 출연하는 극단 춘추의 <물리학자들>은 스위스 극작가 프리드리히 뒤렌마트의 작품. 신과 인간 구원의 문제와 자유, 정의의 문제를 다룬 연극에서 정욱은 깊이 있는 연기를 선보이고 있다. 한때는 드라마에도 출연해온 정욱이지만 주로 연극무대에서 활약하면서 잔뼈가 굵어 온 배우다.
윤문식(79)이 출연하는 연극 <몽땅 털어 놉시다>는 아버지와 아들이 여행을 떠났다가 살인사건에 휘말리면서 다양한 인간군상과 마주친다는 내용이다. 오랫동안 마당놀이 등에서 활약해온 윤문식이 녹슬지 않는 연기 솜씨를 과시한다.
마임과 사이코드라마를 접목한 연극 <건널목 삽화>는 기차 건널목에서 만난 두 사내가 그늘진 과거를 털어놓으면서 전개되는 이야기다. 마임계의 대가 유진규(71)와 선 굵은 연극배우 기주봉(67)이 출연한다. 이밖에도 독일의 해롤드 뮐러의 작품을 원작으로 한 <메리 크리스마스, 엄마!>에는 우리나라 연극계를 대표하는 여배우 손숙(78)이 출연한다.
이처럼 대학로를 지키는 원로 및 중진 배우들이 많다는 것은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특히 90세를 목전에 둔 배우들이 특별출연도 아니고 중견배우들도 감당하기 힘든 묵직한 작품에 도전해 기대 이상의 성과를 거둔다는 것은 뒤를 이어가는 연기자들에게 큰 본보기가 되고 있다.
오광수 대중문화평론가(시인)_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를 졸업하고 오랫동안 문화 분야에서 기자로 일했다. 저서로는 시집 <이제 와서 사랑을 말하는 건 미친 짓이야>, 에세이집 <낭만광대 전성시대> 등이 있다. 현재는 문화 현장에서 일하면서 평론가로도 활동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