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거 예정이던 경찰 초소를 시민을 위한 공간으로 탈바꿈시킨 초소책방
‘인왕산 초소책방’을 가다
“벽돌아, 너는 무엇이 되고 싶니?”
20세기 미국의 건축 거장 루이스 칸은 벽돌이든 문이든 건축적 의미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벽돌 하나라도 무엇으로 어떻게 만들어야 하는지 질문한 것이다. 철거 예정이던 경찰 초소를 시민을 위한 공간으로 탈바꿈한 ‘인왕산 초소책방’은 그런 의미에서 과거 기억과 흔적의 공간이면서 현재 인왕산을 드나드는 사람들에게 쉼터이기도 하다. 서울 종로구 사직동에 있는 사직공원에서 황학정을 끼고 인왕산 방향으로 올라가면 작은 건물이 보인다. 초소책방 외관은 직사각형 형태이지만 내부가 훤히 보여 고즈넉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1968년 1월 무장 공비 김신조의 침투 이후 청와대 방호 목적을 위해 세워진 경찰 초소가 이 건물이 지어진 이유였다. 경찰 초소는 도심 속 비무장지대(DMZ)로 불리며 반세기 동안 인적이 끊겼다.
방호 근무를 서는 경찰들이 개인 초소에서 경계 근무를 선 뒤에 복귀해 잠을 자고 밥을 먹는 생활공간이었다. 층고가 다른 두 공간으로 나뉘어 있었는데 층고가 높은 공간에는 2층 침대가 여러 개 놓였고 층고가 낮은 공간에는 화장실과 식당 그리고 샤워실이 있었다. 도로를 향해 키 높은 담장이 쳐 있어 외부인은 볼 수조차 없는 폐쇄적인 건물이었다.
▶초소책방 안에서 시민들이 마스크를 쓰고 책을 읽고 있다.│종로구청
▶초소책방 2층에 놓인 원목 테이블에 앉아 있으면 창밖으로 인왕산의 풍경을 감상할 수 있다.│초소책방 누리집
인왕산 개방하면서 새 용도로 탈바꿈
그러나 2018년 5월 청와대가 경호·군사 목적 시설물이 배치돼 일반인 접근이 부분적으로 통제된 인왕산 지역을 완전히 개방하면서 폐쇄적인 건물은 새로운 용도로 탈바꿈하게 된다. 앞서 문재인 대통령은 2018년 3월 10일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 건축가 승효상 동아대 석좌교수 등과 탐방로를 둘러보며 인왕산 개방 취지를 알리기도 했다.
경찰 초소는 2020년 11월 책방으로 단장해 문을 열었다. 기존 건물이 폐쇄적이었던 것에 반해 새롭게 문을 연 초소책방은 안과 밖의 자연경관이 경계를 이루지 않고 물 흐르듯 흐른다. 건축물 주변의 오래된 나무, 건물 뒤에 있는 바위 경관이 그대로 실내 공간으로 이어진다. 유리를 벽으로 쓴 책방에 앉아 있으면 자연 속에 앉아 있는 느낌이 든다. 주변 숲이나 산책로와 이질감을 줄이고자 건물 전체 데크에 목재를 사용했다. 인왕산을 드나드는 사람들은 이곳에서 커피를 마시거나 책을 읽는다. 낮부터 앉아 쉬다가 인왕산의 밤을 만나기도 한다. 기억의 공간이면서 오늘의 이야기를 담는 책방이다.
건물을 살펴보면 벽돌 하나, 철문 하나에도 기억과 건축적 의미를 보존하려 했다. 기존 경찰 초소의 철근콘크리트 골조는 살리면서 1개 층을 증축해 지상 2층 규모의 북 카페·전망대로 탈바꿈했다. 1968년 김신조 사건 이후에 세워졌기에 분단과 대립의 아픔을 남겨놓은 것이다. 벽돌로 된 두 곳의 초소 외벽이 남겨져 있으며 초소의 철제 출입문 두 개를 그대로 두었다. 초소의 난방용 보일러를 위한 기름 탱크도 초소책방 옆 거대한 바위 아래에 녹슨 모습 그대로 남겨두었다. 그 결과 서울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초소의 흔적까지 살려낸 현대식 건물이 탄생한 것이다.
▶초소책방 서가에 환경 관련 책들이 꽂혀 있다.
적극행정 경진대회 국무총리상 수상
초소책방 문을 열고 내부로 들어가면 향긋한 커피와 빵 냄새가 난다. 초소책방은 카페, 책방, 갤러리 등 다양한 문화 기능을 동시에 지니는 복합문화공간을 지향한다. 1층에는 계산대, 빵과 함께 다양한 책이 진열돼 있다. 초소책방은 많은 책 중에서도 환경문제를 중심으로 서고를 꾸몄다. 환경문제를 진지하게 제기하고 극복 방안을 생각하는 책과 일상에서 실천할 수 있는 내용을 담은 책, 더 근본적으로 우주와 생물에 관해 논하는 고전까지 두루 갖췄다. 2층으로 오르면 다양한 미술 작품이 전시돼 있다. 창가 자리는 인왕산 바위 앞에 있는데 거대한 바위를 배경으로 책을 읽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다.
특히 2층과 연결되는 옥상(루프톱)은 인왕산의 자연을 만끽하는 명당으로 푸른 하늘과 남산서울타워를 한눈에 볼 수 있다. 공공건축가 이충기 서울시립대 교수가 참여한 이 건물은 어디든 안과 밖이 서로 통하는 유리로 돼 있으며 사방으로 드나들 수 있는 문이 있다.
이러한 특성은 앞으로 이곳을 방문하는 사람들에게 공간이 활짝 열려 있음을 뜻한다. 초소책방을 나서 위로 올라가면 인왕산 등산로가 나온다. 높이가 338.2m인 인왕산 정상에서 우측으로 경복궁과 시내가 한눈에 보인다. 주변에 약수터도 많고 기차바위, 치마바위 등 기이한 모습의 바위가 즐비하다.
인왕산을 개방할 때 처음부터 초소책방이 기획된 것은 아니다. 방호 시설이라는 본래 목적을 잃은 탓에 철거 위기를 겪던 건물이 시민에게 환원되기까지 복잡한 과정과 시간이 흘렀다. 군사통제구역, 도시자연공원구역 등 다양한 규제 법규로 신규 건축이 어려웠다. 초반에는 화장실 하나조차 쉽게 지을 수 없던 이곳은 종로구청이 건축, 조경 등 각 분야 전문가와 협업하고 주민의 의견을 수렴해 증축·리모델링했다. 초소책방은 이 과정을 인정받아 행정안전부가 주관하는 ‘2020년 하반기 적극행정 경진대회’에서 국무총리상을 수상했다.
▶초소책방에서 바라본 서울 시내의 빌딩 숲과 남산의 풍경│초소책방 누리집
▶문재인 대통령이 2018년 3월 10일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 건축가 승효상 동아대 석좌교수 등과 인왕산 탐방로를 둘러보고 있다.│청와대
유관 기관 협의 거쳐 3년 만에 문 열어
프로젝트를 묵묵히 담당한 사람은 종로구청 공원녹지과 박상현 주무관이다. 박상현 주무관은 인사혁신처가 공개한 영상 ‘소중한 적극행정의 성공 스토리’에서 “초소를 그대로 남겨둘지 처음에는 의견이 분분했다. 유수의 전문가들, 지역 주민의 의견을 받으면서 경찰 초소 건물을 살려 시민에게 환원하자는 결론에 이르렀다. 처음에는 작은 쉼터 하나를 만들까 하다가 전문가 의견을 바탕으로 책방으로 결정했다”고 회고했다.
초소책방이 문을 열기까지 3년의 시간이 바쁘게 흘러갔다. 첫 1년은 유관 기관과 협의하고 설득하는 데 시간이 걸렸다. 그다음 1년은 초소책방을 설계하고 건물 콘셉트를 정했다. 마지막 1년은 건물을 지어 현재의 초소책방을 만들었다. 유관 기관과 협의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린 이유는 기관마다 역할이 달랐기 때문이다.
박 주무관은 “통제구역이 개방된다는 것은 지켜야 하는 영역뿐만 아니라 경계나 작전도 다시 짜야 된다는 뜻이다. 또 다른 통제 역할이 요구되기 때문에 갈등을 해소하는 데 시간이 걸렸다”며 “개방할 수 있는 법적인 규정을 만들고 시민에게 환원하는 취지와 대승적 차원을 이야기하며 협의와 설득의 과정을 거쳤다”고 설명했다.
박유리 기자
사회·문화적 가치 녹여낸 건축물
적극행정 사례 교육으로도 활용
‘인왕산 초소책방’은 사회·문화적 가치를 녹여낸 공공건축물로 인정받아 잇달아 건축상을 수상했다. 2020년 대한민국 공공건축상을, 2021년 8월에는 제39회 서울특별시 건축상 우수상을 수상했다. 1979년 시작해 2021년 39회째를 맞은 서울특별시 건축상은 건축문화와 기술 발전에 기여한 건축주와 설계자를 시상하고 격려하는 서울시 건축 분야에서 최고 권위의 상이다. 2021년에는 총 84개 작품을 놓고 서류·현장 심사를 진행해 최종 수상작을 선정했다.
단순히 철거하거나 개방하고 가만히 두기만 했어도 됐을 공간이지만 새 단장을 위해 적극행정을 통해 고민하기 시작했다. ‘어떻게 시민에게 환원할 수 있을까?’에서 시작한 초소책방은 현재 민간 위탁자가 운영을 맡고 있다. 이러한 적극행정의 결과물은 또 다른 공무원에게 영감을 주는 공간이 됐다.
국방부의 MZ세대(밀레니얼+Z세대) 직원들이 적극행정 사례 교육으로 적극적인 공직 문화 선도에 필요한 아이디어를 얻는 시간을 경험한 것이다.
국방부는 9월 28일 ‘국방 혁신 어벤져스’를 대상으로 초소책방의 적극행정 사례 교육을 진행했다. MZ세대 직원으로 구성된 국방 혁신 어벤져스는 조직문화 개선을 위한 아이디어 제시 등 다양한 활동으로 국방부 조직에 활력을 불어넣었다. 이번 교육에는 인왕산 초소의 한계를 극복하고 시민 휴게 공간을 탄생시킨 박상현 서울 종로구청 공원녹지과 주무관이 강사로 참여해 적극행정의 취지와 과정을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