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더위 날려버리는 우리말
장대비가 내리며 더위가 한풀 꺾이나 싶더니 여전히 폭염입니다. 이런 날은 별일 아닌데도 화가 나고 조금만 귀찮아도 짜증이 밀려오는데요. 그야말로 ‘날씨와 전쟁’입니다.
예전에는 이처럼 무더운 날이면 꼭 ‘등목’을 했습니다. 더운 여름날 웃통을 벗고 엎드리면 물을 한 바가지 등에 끼얹는 것인데요. 마당 우물가에서, 수돗가에서 펌프 앞에 엎드리면 다른 사람이 펌프로 자아올린 지하수로 등을 문질러줬죠. 그 시원한 바가지 물세례를 받고 나서 수박 한 조각 먹으면 여름은 이미 저만치 물러간 느낌이었는데요. 지금이야 번듯한 목욕시설이 잘돼 있지만 그 시절 등목의 시원함은 따라가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등목, 목물, 등물
이처럼 ‘팔다리를 뻗고 엎드린 사람의 허리에서부터 목까지 물로 씻어 주는 것’을 등목이라고 하는데요. 비슷한 말로 목물, 등물이 있습니다. 두 단어 모두 뜻은 ‘상체를 굽혀 엎드린 채로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아 허리에서부터 목까지 물로 씻는 일’을 말하는데요. 처음에는 목물만 표준어였다고 합니다.
한때 ‘목물의 잘못’이라고 규정했던 등목과 등물은 사람들 입에 자주 오르내린다는 점을 이유로 각각 1999년, 2011년 표준어가 됐습니다. 지금도 표준국어대사전을 찾아보면 ‘등목하다’ ‘등물하다’는 없지만 ‘목물하다’는 표준어로 올라 있습니다.
이쯤에서 ‘등멱’은? 이라며 의아해하는 사람들도 있을 텐데요. 등멱에서 멱은 ‘냇물이나 강물 또는 바닷물에 들어가 몸을 담그고 씻거나 노는 일’을 뜻하는 말로 ‘미역’의 준말입니다. 흔히 ‘미역을 감다’ ‘멱을 감다’ 등으로 표현하는데요. 하지만 표준국어대사전에 따르면 등멱은 ‘목물의 북한어’로 표준어가 아닙니다.
이처럼 등은 더위와 연관된 표현이 많은데요. ‘등골이 오싹하다’는 말이 대표적입니다. ‘몹시 무섭거나 추워서 등골이 갑자기 움츠러들거나 소름이 끼친다’는 뜻으로 추운 기운과 두려움을 느낄 때 두루 쓰입니다. ‘등골이 서늘하다’는 말도 있습니다. 역시 무더위를 날려버린다는 의미와 두려움으로 아찔하다는 뜻을 지녔습니다.
등골이 빠지다, 등골을 빼먹다
등골은 ‘힘들다’는 표현에도 자주 등장하는데요. 등골은 등 한가운데로 길게 고랑이 진 곳이라는 의미와 의학적으로 척추에 있는 뼈의 신경을 말하는데요. 그만큼 중요한 조직인데 이곳에 손상이 올 경우 여러 가지 신체적 고통을 받습니다.
따라서 ‘등골이 빠지다’라는 표현은 견디기 힘들 만큼 몹시 힘이 든다는 뜻을 지닙니다. 이밖에도 남의 재물을 갈취해 긁어먹는 ‘등골을 빼먹다’, 남을 몹시 고생스럽게 하는 것을 가리키는 ‘등골을 뽑다’, 어떤 일을 해내느라 몹시 힘이 들고 고생스럽다는 ‘등골이 휘다’ 등의 표현도 있습니다.
한때 ‘등골 브레이커(breaker)’라는 신조어가 화제였는데요. 부모에게 경제적으로 큰 부담을 지우는 사람이나 제품 따위를 속되게 이르는 말로 ‘부모의 등골을 휘게 할 만큼 비싼 상품’을 일컫습니다. 같은 의미로 ‘등골 백팩(backpack)’이란 말도 있습니다. 부모에게 경제적으로 큰 부담을 지우는 비싼 백팩(배낭)을 속되게 이르는 표현인데요. 신조어가 새로운 사회 현상과 세태를 고스란히 담은 만큼 씁쓸한 느낌입니다.
며칠 전 사춘기 아들에게 등목을 권했습니다. 한사코 거부하더니만 이내 웃통을 벗고 준비하더군요. “엇 차가워!! 어후 시원해.” 연거푸 비명에 가까운 소리를 질러대던 아이는 꽤 시원한지 싫지 않은 표정이었는데요. 샤워와는 차원이 다른 시원한 물 한 바가지가 주는 다정함과 정겨움을 느꼈길 바라봅니다.
백미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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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K-공감누리집(gonggam.korea.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