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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를 나타내는 다양한 우리말
장마철입니다. 2021년은 장마가 예년보다 늦게 찾아온 탓에 지각장마라는 말을 많이 하는데요. 제철이 지난 뒤에 드는 장마의 정확한 표현은 ‘늦장마’입니다. 비가 거의 오지 않아 맑은 날이 계속되면 ‘마른장마’, 여러 날 동안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면 ‘억수장마’, 초가을에 오다 말다 하는 장맛비는 ‘건들장마’라고 하는 등 장마의 종류도 참 다양한데요.
하지만 기상학에선 이런 토박이말보다 호우, 집중호우, 국지(게릴라)성 호우 등 한자어나 으레 써온 말들을 더 많이 사용하는 현실입니다. 하늘에 의지해 농사를 지어야만 했던 우리 조상들은 비의 양과 내리는 시기, 세기 등에 따라 다양한 이름을 지었는데요. 생소하지만 재미난 유래와 지혜가 담긴 이름이 많습니다. 오늘은 비를 나타내는 다양한 우리말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일비·잠비·떡비·술비
먼저 비가 내리는 기간에 따라선 봄비, 여름비, 가을비, 겨울비가 있습니다. 봄비, 가을비, 겨울비는 노랫말에도 제법 사용됐는데 여름비는 생소한 느낌이죠? 소나기나 장맛비 등 여름에 내리는 비를 통틀어 여름비라고 합니다. 재미있는 것은 봄비는 일비, 여름비는 잠비, 가을비는 떡비, 겨울비는 술비라고도 불린다는 사실인데요.
봄에는 비가 오더라도 부지런히 일을 해야 한다는 의미로, 여름에는 비 오는 날 낮잠을 잘 수 있게 하는 비라는 의미로, 가을에는 떡이나 먹을 수 있게 하는 비라는 의미로, 겨울에는 술 마시며 놀 수 있게 하는 비라는 의미라고 합니다. 이밖에 밤비(밤에 내리는 비) 칠석물(칠석날에 오는 비)도 있는데요. 밤비는 있지만 낮비(낮에 내리는 비)라는 단어는 없답니다.
안개비·는개·이슬비·가랑비·장대비·억수
비의 양과 관련된 용어는 더 다양합니다. ▲안개비(내리는 빗줄기가 매우 가늘어서 안개처럼 부옇게 보이는 비) ▲는개(안개비보다는 조금 굵고 이슬비보다는 가는 비) ▲이슬비(아주 가늘게 오는 비) ▲가랑비(가늘게 내리는 비) ▲장대비(장대처럼 굵고 거세게 좍좍 내리는 비) ▲억수(물을 퍼붓듯이 세차게 내리는 비) 등이 있는데요. 빗방울의 굵기를 기준으로 ‘안개비‹는개‹이슬비‹가랑비‹장대비‹억수’ 순으로 세차진다고 보면 되겠습니다.
여우비·소나기·산돌림·궂은비·장맛비
비가 내리는 형태에 따라서도 여러 가지로 부릅니다. ▲여우비(볕이 나 있는 날 잠깐 오다가 그치는 비) ▲소나기(갑자기 세차게 쏟아지다가 그치는 비) ▲산돌림(여기저기 옮겨 다니면서 한 줄기씩 내리는 소나기) ▲궂은비(끄느름하게 오랫동안 내리는 비) ▲장맛비(장마 때 오는 비) 등으로 구분됩니다. 소나기는 소낙비와 함께 복수표준어고요. 궂은비 설명에서 끄느름하다는 ‘날이 흐리어 어둠침침하다’는 뜻으로 계절에 관계없이 끄느름하게 오래 오는 비는 다 궂은비입니다.
단비·약비·찬비·웃비·먼지잼·개부심
비가 내린 뒤 효과에 따라서도 다양합니다. ▲단비(꼭 필요한 때 알맞게 내리는 비) ▲약비(꼭 필요한 때에 내리는 비) ▲찬비(차갑게 느껴지는 비) ▲웃비(아직 우기(雨氣)는 있으나 좍좍 내리다가 그친 비) ▲먼지잼(비가 겨우 먼지나 날리지 않을 정도로 조금 옴) ▲개부심(장마에 큰물이 난 뒤 한동안 쉬다가 한바탕 내리는 비) 등이 있는데요. 먼지잼에서 ‘잼’은 ‘재움’의 줄임말로 먼지나 잠재울 정도로 아주 조금 내리는 비를 말하고요. 개부심에서 ‘부심’은 그릇 따위를 씻어 깨끗하게 한다는 뜻으로, 장마 때문에 생긴 명개(흙)가 장마가 그친 뒤에 도로 등에 쌓여 있다가 다시 오는 비로 인해 깨끗이 씻겨 내려가는 현상이나 그 비를 의미합니다.
비와 관련된 말들도 다양합니다. ‘비거스렁이’는 비가 갠 뒤에 바람이 불고 기온이 낮아지는 현상이고 ‘비설거지’는 비가 오려고 하거나 올 때 비에 맞으면 안 되는 물건을 치우거나 덮는 일을 말합니다. ‘지짐거리다’는 조금씩 내리는 비가 오다 말다 하며 자주 내린다는 의미로 지짐대다, 지짐지짐하다 역시 같은 말입니다.
2021년은 39년 만에 가장 늦게 시작된 변덕스러운 장마로 걱정이 커지고 있는데요. 지치고 각박해진 마음에 아름다운 우리말 하나씩 담는 건 어떨까요? 처음에는 생소하고 낯설어도 계속 쓰다 보면 일상 용어가 되기도 하는데요. 먼저 자주 접하는 날씨 단어부터 하나씩 아름답고 순한 말들로 채워보길 바랍니다.
백미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