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관광공사
말에도 ‘원산지 표시’가 있다는 거 아시나요? 단어 앞에 붙어서 그 단어가 가리키는 물건이 어디에서 왔는지 나타내준다는 건데요. 19세기 후반 접어들어 문호가 개방되자 그때까지 볼 수 없었던 새로운 물건들이 물밀 듯이 들어와 우리 삶 속에 깊이 파고들었는데요. 새로 들어오는 사물에 매번 적당한 이름을 붙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겁니다. 그래서 선조들은 이미 있는 사물 중에서 비슷한 것을 골라 그 이름 앞에 사물이 들어온 곳을 표현하는 말을 덧붙여 새로운 이름을 만들기도 했는데요. 대표적인 것이 서양을 뜻하는 ‘양(洋)-’입니다.
서양을 뜻하는 ‘양(洋)-’
우리가 지금 흔히 사용하는 ‘양말(洋襪)’이 그중 하나입니다. 원래 버선을 말(襪, 버선말)이라고 했는데 서양에서 버선과 비슷한 것이 들어오니까 버선을 뜻하는 말에 ‘양’을 붙여 양말이라고 부른 것입니다. ‘양철(洋鐵)’도 마찬가지입니다. 쇠는 쇠인데 원래 우리가 쓰던 쇠와는 다른 것이 들어오니까 철에 ‘양’만 붙여 양철이 된 것입니다. ‘양은(洋銀)’은 구리, 아연, 니켈 따위를 합금해 만든 금속을 말하는데요. 라면 등을 끓일 때 쓰는 노란 냄비는 이걸로 만들었습니다.
일상용어에선 잘 사용하지 않지만 ‘양회(洋灰)’와 ‘양행(洋行)’도 있습니다. 양회는 토목이나 건축의 재료로 쓰는 접합제로 시멘트를 뜻하고 양행은 서양에 다닌다는 뜻으로 무역회사를 말하는데요. 오늘날 ○○양행이나 ○○양회란 회사명칭은 그렇게 해서 생긴 것이라고 합니다. 이외에 양복(洋服) 양식(洋食) 양옥(洋屋) 양주(洋酒)처럼 한자어와 결합한 것과 ‘양변기’ ‘양파’ ‘양배추’ 같이 우리말과 이어진 것들도 있습니다.
중국에서 들어온 ‘호(胡)-’ ‘당(唐)-’
사물의 원산지를 표시하는 말로 ‘양’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나라에 사물이 들어오는 주된 경로가 중국과 일본이었던 만큼 중국과 일본에서 들어온 것을 가리키는 말들도 있습니다. 중국에서 들어온 것임을 나타내는 말에는 여러 개가 있는데 먼저 ‘호(胡)-’를 들 수 있습니다.
호는 예전에 ‘오랑캐’를 이르던 말로 호가 쓰인 말 가운데 대표적인 게 ‘호주머니’입니다. 원래 한복에는 주머니가 달려 있지 않았는데요. 전투나 수렵을 위한 연장을 몸에 지녀야 했던 북방의 유목 민족들이 옷에 붙인 주머니를 보고 우리 선조들이 호주머니라 부른 것에서 비롯됐다고 합니다. 이밖에 겨울철 길거리 음식으로 유명한 ‘호떡’, 추위에 잘 견디는 성질의 ‘호밀’의 ‘호’가 모두 중국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호콩’은 현재 ‘땅콩’이란 말로 대체됐고 ‘호도’나 ‘호초’는 소리가 바뀌어 각각 ‘호두’ ‘후추’로 쓰입니다.
중국에서 들어온 것임을 나타내는 말로는 ‘당(唐)-’도 있습니다. ‘당근(唐根)’은 전파된 시기와 전파 경로가 명확한 기록은 없지만 ‘당나라에서 건너온 뿌리식물’이어서 당근으로 이름 지었다는 설이 있습니다. 잡채를 만들 때 쓰는 ‘당면(唐麵)’도 마찬가집니다. ‘당나라에서 건너온 면’이라는 뜻입니다. 충청남도 ‘당진(唐津)’이라는 지명은 산둥반도와 지리적으로 가까워 ‘당나라를 오가는 나루터’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이외 당나귀나 당닭, 그리고 까마귓과의 겨울새인 당까마귀도 있습니다.
일본에서 들어온 ‘왜(倭)-’
일본에서 들어온 것을 가리키는 말로는 ‘왜(倭)-’를 사용했는데요. 일본식으로 만든 간장을 ‘왜간장’이라 하고 ‘조선낫’에 비해 날이 짧고 얇으며 자루가 긴 낫을 ‘왜낫’이라고 합니다. 이외 왜된장, 왜떡, 왜소금, 왜전골, 왜철쭉 등도 있습니다.
이처럼 단어 앞에 붙여 새로운 사물 이름을 만든 것과 달리 원래 이름을 줄여서 만든 말도 있습니다. 동남아에서 유래한 ‘남방’인데요. <우리말 유래 사전>에 따르면 남방은 ‘남방(南方) 셔츠’가 줄어든 말로 여기서 남방은 동남아 지역을 가리킵니다. 동남아는 날씨가 덥기 때문에 옷 모양을 소매가 짧고 통풍이 잘 되도록 헐렁하게 만들어 입었는데요. 날씨가 더운 남방 지방에 사는 사람들이 주로 입는 모양의 옷이라는 뜻으로 만든 말입니다.
이렇듯 말은 1000년 전 수출과 수입 이력도 남기는 만큼 K-팝, K-푸드, K-방역 등에 이르기까지 한류가 뜨거운 21세기에 우리말도 언젠가는 다른 나라들의 역사가 되고 또 누군가의 일상이 되지 않을까요? 주인인 우리가 더욱 아끼고 바르게 사용하면서 좋은 정보를 담아 수출되길 기대해봅니다.
백미현 기자
참고 자료: 조남호(국립국어원), <새국어소식> / 홍윤표(연세대), ‘양말’과 ‘양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