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유공자 명패 달아드리기
“늘 자랑스럽죠. 할아버지에 이어 아버지까지 2대가 독립운동을 한 경우가 흔하진 않을 겁니다.”
5월 27일 서울 광진구 한 아파트. 조상묵(82·광복회 서울특별시지부 광진구지회장) 씨가 집 문에 걸린 ‘국가유공자 명패’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명패에는 ‘독립유공자의 집’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4월 8일 김선갑 광진구청장이 직접 방문해 달아드린 명패다.
▶곽윤섭 기자
조 씨의 아버지 조복선 선생과 할아버지 조기수 선생은 모두 1919년 3월 21일 경북 안동 임하면 일대에서 3·1만세운동을 벌이다 체포됐다. 두 선생은 마을 청년, 유지 등 300여 명을 집 마당에 소집해 음식을 대접하고 사전에 제작한 태극기를 나눠주며 대한독립만세를 선창했다. 특히 조 씨의 아버지 조복선 선생은 1919년 7월 4일 일제에 체포돼 1년 6개월의 형을 받고 대구감옥에 있다가 1921년 2월 4일 출소했다. 출소 후에도 일본 경찰은 온 가족을 주재소에 호출해 갖은 학대와 고문을 했다. 조기수 선생은 독립운동에 대한 공로를 인정받아 2019년 3월 대통령 표창을 받았고, 조복선 선생은 1982년 대통령 표창을 받은 후 1990년 건국훈장 5등급 애족장으로 승격됐다.
조 씨는 “아버지는 고문 후유증에 시달려 일을 제대로 할 수 없었고, 돈이 없어 병원에서 치료도 거의 받지 못하셨다”면서 “어릴 때 경찰과 친일파들이 수시로 찾아와 행패를 부렸다”고 지난 시절을 회상했다. “할아버지는 직접 뵌 적은 없는데 나라를 위해 의로운 일을 하신 일화를 많이 들었다”고 덧붙였다.
▶이낙연 국무총리가 2018년 11월 3일 광주 남구 봉선동노동훈 애국지사의 자택을 찾아 ‘국가유공자의 집’ 명패를 달아드리고 있다.| 국가보훈처
유관순 열사 조카 집·박차정 의사 생가 등
“할아버지는 일찍이 한학을 수학한 후 서당을 차려서 수많은 후진을 양성하고, 제자들과 함께 국권회복운동 등을 하다 만세운동까지 하신 걸로 알고 있어요. 아버지와 할아버지만 그러셨던 게 아니에요. 어머니, 할머니는 만세운동 때 사람들한테 음식을 대접하는 등 헌신적으로 지원하셨어요. 두 분도 독립운동을 하신 거나 다름없지요.” 조 씨는 “저희가 9남매인데 ‘독립운동을 하면 3대가 망하고, 친일하면 3대가 흥한다’는 말, 틀리지 않을 정도로 가족 모두 힘들게 살았다”고 했다. “나라 위해 목숨을 바친 분들이 있어서 지금 우리가 있고, 우리나라가 있는 거잖아요. 그걸 생각해서 국가가 예우를 잘 해주셔야 해요.”
서울 동대문구 유관순 열사의 조카 유장부 씨 댁, 서울 서초구 남자현 의사의 손자 김시복 씨 댁, 부산 박차정 의사의 생가, 인천 서구 선화인 애국지사 후손 선순자 씨 댁, 강원도 이영호 선생의 손자 이계동 씨 댁…. 올해 초부터 전국의 독립유공자 본인 또는 후손의 집 대문에 자랑스러운 명패가 하나씩 걸리고 있다. 바로 ‘국가유공자 명패’다.
▶피우진 국가보훈처장이 5월 17일 광주 북구에 위치한 5·18민주유공자 강길조 씨 자택을 방문해 ‘5·18 민주유공자의 집’명패를 달아드리자 강 씨가 활짝 웃고 있다.
‘국가유공자 명패 달아드리기’ 사업은 나라를 위해 헌신한 국가유공자에 대한 사회적 예우 분위기를 조성하고 국가유공자의 자긍심을 높이자는 취지로 국가보훈처가 지방자치단체와 협력해 추진하는 사업이다. 2019년 1월 독립유공자를 시작으로 4월에는 민주유공자가 수혜를 받았다. 5월 17일 피우진 국가보훈처장은 5·18민주화운동 기념식 계기 현장행정의 일환으로 광주 북구에 위치한 5·18 민주유공자 강길조 씨 자택을 방문해 ‘5·18 민주유공자의 집’ 명패를 달아드린 바 있다. 6월부터는 6·25 참전유공자를 비롯해 상이군경, 무공수훈자 등 국가유공자를 대상으로 국가유공자 명패 달아드리기 사업을 단계적으로 확대·실시할 계획이다.
국가유공자 명패 달아드리기 사업은 문재인 대통령이 2018년 6월 6일 현충일 추념사를 통해 국가유공자를 존경하는 마음을 국민들과 함께 나누기 위해 ‘국가유공자 명패’를 통일하는 사업을 지시한 후 본격화됐다.
▶5월 3일(현지시각) 호주 조지 루이스 쇼의 외증손녀인 레이첼 사 씨 자택에 방문해 레이첼 사 씨에게 독립유공자의 집 명패를 수여하고 있다.
대통령 현충일 추념사 이후 본격화
이후 보훈처는 3·1운동 및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 독립유공자를 시작으로 국가유공자 명패 달아드리기 사업을 본격적으로 추진했다. 독립유공자에 대한 예우 분위기 조성 및 확산을 위해 광주학생독립운동 기념일이던 2018년 11월 3일에는 이낙연 국무총리가 노동훈 애국지사 자택을 방문해 명패를 달아드리기도 했다.
2019년 첫 독립유공자 명패 달아드리기 행사는 독립유공자 임우철 애국지사 자택에서 이루어졌다. 1월 25일 피 처장은 서울 동작구 임 애국지사 자택을 방문해 명패를 직접 달아드렸다.
국가보훈처는 임 애국지사에 대해 “1941년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 공옥사고등학교 토목과 재학 중 동급생들과 함께 내선일체(內鮮一體·조선과 일본은 하나라는 뜻으로, 1937년 일제가 전쟁협력 강화를 위해 취한 침략 정책)의 허구성을 비판하고, 궁성요배(宮城遙拜·식민지 주민들이 도쿄(궁성)를 향해 절하도록 강요한 예법)의 부당함을 주장하는 등 민족의식을 드높이다 1942년 12월 체포돼 치안유지법 위반과 불경죄로 징역 2년 6월을 받았다”고 소개했다. 임 애국지사는 2001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받았다.
피 처장은 당시 “오늘의 대한민국은 지사님과 같은 독립유공자분들의 희생과 헌신이 있었기에 가능했으며, 3·1운동 및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인 올해 독립유공자를 비롯한 국가유공자분들의 자택에 명패를 달아드릴 수 있게 돼 매우 뜻깊다”라고 말했다.
▶5월 4일(현지 시각) 시드니에 위치한 전성걸 선생 후손인 자녀 전춘희 씨 자택에 방문해 달아드린 명패를 전충희 씨가 바라보고 있다.
국가유공자 명패 달아드리기 사업은 멀리 해외에서도 진행했다. 5월 3일(현지 시각) 피 처장은 호주 빅토리아주에 사는 영국인 독립유공자 조지 루이스 쇼의 외증손녀인 레이첼 사(51·유일한 직계 증손) 씨 자택을 방문해 ‘독립유공자의 집’ 명패와 영문으로 된 설명판을 수여하고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
조지 루이스 쇼는 1919년 이륭양행 2층에 대한민국임시정부 안동교통국 연락소를 설치해 이륭양행에서 운영하는 무역선을 이용해 무기 운반과 군자금을 전달했고, 임시정부와 국내 연락 등 중요한 창구 역할을 담당했다. 안동교통국의 연락 업무도 직접 수행했다. 이후 1920년 7월 신의주에서 내란죄로 일본 경찰에 체포된 후 외국인이라는 이유로 공소가 취하돼 1924년 3월 석방됐다. 정부는 조지 루이스 쇼 선생의 공헌을 기리고자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해외 거주 외국인 독립유공자 후손에게 명패가 수여된 건 2018년 12월 영국인 베델 선생의 유족에 이어 이번이 두 번째였다.
5월 4일(현지 시각) 피 처장은 호주 시드니에 위치한 전성걸 선생 후손인 자녀 전춘희 씨 자택과 이승준 선생 후손인 자녀 이구직 씨 댁에도 명패를 달아드렸다. 독립유공자인 전성걸 선생은 3·1운동 당시 안주읍의 독립만세 시위운동을 주도, 독립선언서를 배포하고 시위행진을 전개하는 등 우리나라의 독립을 위해 크게 공헌한 인물이다. 독립유공자인 이승준 선생 역시 3·1만세운동에 참여하고, 1928년에는 관공서 파괴와 일제의 고관을 암살할 목적으로 폭탄 제조를 위한 자금을 지원하는 등 우리나라의 독립을 위해 헌신했다.
▶이승준 선생 후손인 자녀 이구직 씨 자택에 방문해 명패를 달아드리고 기념사진을 찍었다.| 국가보훈처
“국가유공자 위상·정체성 제고 기대”
국가유공자 명패에 새겨진 국가유공자 상징은 태극기에 있는 태극에 불꽃 도형이 결합된 디자인이다. 이는 2018년 12월 정부가 존경과 예우의 의미를 담아 새롭게 디자인한 것이다. 국가보훈처는 새 상징에 대해 “태극기의 태극과 불꽃을 결합해 국가유공자의 숭고한 의미와 희생을 표현했고, 윗부분은 태극기의 건괘로 처리해 하늘을 공경하는 우리 민족의 정신과 사상을 함축했다”고 설명했다.
국가유공자 상징을 디자인한 CDR어소시에이츠 김성천 대표는 “국가유공자 상징물이 지금껏 통일되지 않아 사회 속의 유공자들을 명확하게 드러내기가 어려웠다”라고 말하며 “국가유공자를 존경해야 한다는 구구절절한 설명보다는 통일된 상징 하나가 유공자에 대한 존경과 예우를 갖게 하는 구심점이 되어줄 것”이라고 강조했다.
▶4월 8일 서울 광진구 구의3동에서 열린 ‘독립유공자 명패 달아드리기’ 행사 단체 사진 | 광진구청
국가유공자 상징체계 사업을 총괄한 국가보훈처 최정식 홍보팀장은 “국가유공자에 대한 예우와 존경, 감사의 뜻을 담은 상징체계의 도입은 단순한 디자인의 개발이 아니라 통일된 국가유공자와 보훈의 정체성을 확보하는 사업”이라며 “국가유공자에 대한 국민의 이해를 높임으로써, 국가를 위해 헌신하고 희생한 국가유공자의 위상과 정체성을 제고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국가보훈처는 국가유공자 상징을 국가유공자 명패뿐 아니라 국가유공자증, 국가유공자 관련 서식류 등에도 반영하는 통합 체계를 구축하기로 했다.
김청연 기자
K-공감누리집의 콘텐츠 자료는 「공공누리 제4유형 : 출처표시 + 상업적 이용금지 + 변경금지」의 조건에 따라 자유롭게 이용이 가능합니다.
다만, 사진의 경우 제3자에게 저작권이 있으므로 사용할 수 없습니다.
콘텐츠 이용 시에는 출처를 반드시 표기해야 하며, 위반 시 저작권법 제37조 및 제138조에 따라 처벌될 수 있습니다.
[출처] K-공감누리집(gonggam.korea.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