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충주 관아골 살린 이상창 세상상회 대표
“관아골 세상상회로 가주세요.”
주소지를 이야기할 필요가 없었다. 택시기사는 익숙하다는 듯 목적지를 듣자마자 운전대를 틀었다. KTX 충주역으로부터 10분도 채 걸리지 않는 곳, 세상상회는 관아골 대표 카페로 자리매김했다.
과거 충북 충주시 관아골 일대는 읍성이 자리 잡은 역사·예술문화의 중심이었다. 1908년 관찰부가 청주로 이전하면서 쇠퇴하기 시작해 2005년 서충주 신도시 개발 이후 관아골을 포함한 원도심 상권은 재차 쇠퇴기에 접어들었다. 관아골 뒷골목 주민 대다수가 거처를 옮겼다. 해만 지면 불빛 하나 볼 수 없이 고요한 이 골목에 학생들이 모여들어 담배를 피웠다. 일명 ‘담배골목’으로 전락한 관아골에 다시 활기가 찾아든 건 2018년 세상상회가 문을 열면서다.
세상상회 이상창 대표는 2016년 지역활성화센터 컨설턴트로 충주에 처음 왔다. 소멸 위기에 놓인 지역을 되살릴 수 있는 방안을 연구해오던 그는 당시 충주 첫 번째 도시재생사업의 총괄기획 PM(프로젝트 매니저)을 맡았다. 그가 다시 충주를 찾은 것은 약 2년 후였다. 급성백혈병을 진단받고 회사를 나와 요양지를 찾을 때 충주가 떠올랐다. 비슷한 시기 아내는 갑상선암 판정을 받았다. 부부는 아무 연고 없는 충주에 새 보금자리를 마련했다.
그는 요양하러 온 이곳에 왜 카페를 꾸렸을까. 이 대표는 “직업병이 도졌다”고 말했다. 그는 13년 동안 손길이 닿지 않은 구옥을 개조해 세상상회를 만들었다. 두 사람이 지나면 꽉 차는 관아골 골목에 들어선 두 번째 상점이다. 첫 번째 상점은 충주 토박이인 자매가 운영하는 패브릭 공방이다. 세상상회 이후로 빈집을 활용한 청년가게가 연이어 생겨났다. 이젠 주말이면 외지인들의 발길이 끊이질 않는 ‘핫플(핫플레이스)’로 꼽힌다. 이 골목에 불어든 훈풍은 인근에 있는 ‘여인숙 골목’까지 퍼졌다. 기능을 상실한 지는 오래지만 여인숙 네 채가 줄지어 있다고 해 붙은 여인숙 골목도 하나둘 업종을 달리하고 새 옷을 입었다. 세상상회에서 일하던 ‘알바요정(이 대표가 붙인 애칭)’들이 독립해 창업한 가게만도 서너 곳이다.
세상상회는 하루 평균 손님이 얼마나 되나?
낮 12시에 문을 열면 오후 3시까진 계속 오는 편이다. 테이블당 두 명이라고 계산하면 100~120명, 주말에는 그보다 1.5~2배 되는 것 같다. 특히 주말 손님 중 열에 일곱은 외지인이다. 7년 전만 해도 상상하지 못할 풍경이다. 근처 경로당에 오는 분들이나 독거노인만 계실 뿐 젊은 친구들이 올 이유가 없는 곳이었다.
7년 전 어떤 모습이었기에.
1945년에 지어진 건물이 그대로 있었다. 네 번째 주인이 13년간 방치해둔 상태였다. 한 필지에 일제강점기 적산가옥과 근대가옥 두 채가 나란히 선 구조가 마음에 들었다. 연식에 비해 상태도 괜찮았다. 집주인을 설득해 한 달 만에 필지와 건물을 7000만 원에 매입했다. 리모델링을 할 때 안전성을 우선으로 하되 벽돌이나 천장은 그대로 살리는 등 건물이 본래 지닌 가치를 유지하려고 노력했다. 시간의 켜는 인테리어로 만들 수 없기 때문이다.
성장 가능성을 내다보고 투자한 건가?
낡은 건물과 붕괴된 커뮤니티를 계속 보고 있으니 자연스럽게 직업병이 도졌다. 그렇다고 이 골목을 살려볼 엄두는 못냈다. 인구감소지역이 사회적 화두로 떠오르면서 흐름을 잘 탄 것 같다. 세상상회를 차리고 3년쯤 지나니까 주변에서 ‘로컬크리에이터’, ‘도시재생 활동가’라고 부르던데 스스로 그렇게 생각한 적은 없다. 하다보니 오늘까지 오게 됐다. 오죽하면 나의 첫 강의 주제가 ‘하다 보니 도시재생’이었겠나(웃음).
많은 업종 중에 카페를 선택한 이유는 무엇이었나?
아내가 구두 디자이너였는데 결혼 뒤에 일을 그만두고 베이킹 자격증을 따더니 전문가가 돼 있더라. 그러다 우연히 아내가 자주 다니던 카페에 가게 됐는데 유학 시절 마신 커피 맛과 똑같더라. 뉴질랜드인 부부가 운영하는 작은 로스터리 카페였다. 거기서 1년 동안 커피를 배우다가 두 분이 뉴질랜드로 돌아가면서 장비를 모두 준 덕에 지금까지 쓰고 있다.
지역에 내려가면 텃세가 있다고 하던데.
전혀 없었다. 참 사람 좋은 동네다. 충주에 빠진 이유기도 하다. “젊은 사람이 다 늙어빠진 동네에 와서 뭣하느냐. 미친놈 아니냐”라는 소리를 듣긴 했다. 한때는 ‘부동산값만 올리고 도망가겠거니’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었겠지만 변함없이 자리를 지키니까 지역 토박이분들도 인정해주신 것 같다.
직원들을 ‘알바요정 n호’라고 부르던데.
16호까지 생겼다. 초기 3년간은 아내랑 둘이서만 카페를 운영했다. 우리가 누굴 부릴 깜냥이 아니었다. 몇몇 단골손님이 휴학 중이라고 해서 “여기 와서 일해보는 건 어떻겠느냐”고 제안하기도 하고 알음알음 소개받은 경우까지 벌써 열여섯 명이다. 그중 1호는 세상상회 옆에 스튜디오를 열었고 4호는 ‘여인숙 골목’에서 10년 넘게 비어 있던 여인숙을 사서 카페와 숙박업을 시작했다.
이 대표의 본업이 ‘카페 사장’이라면 부업은 ‘보탬플러스 협동조합원’이다. 자칭 ‘충주 오지라퍼’라고도 한다. 관아골의 청년 창업자들은 협동조합(현 보탬플러스주식회사)을 결성해 하고 싶은 일을 함께해오고 있다. 바로 창의적인 콘텐츠를 만들어 지역에서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는 일이다. 예를 들면 7년째 한 달에 한 번 관아골 골목을 중심으로 플리마켓인 ‘담장마켓’을 열고 있다. 전국 60개 판매팀이 참여하며 매회 약 2000명의 손님이 몰려든다. 그러나 이 대표가 지향하는 관아골은 ‘핫플’이 아닌 ‘웜플(warm-place)’이다. 잠깐 뜨거운 관심을 받다가 사라지는 곳보다 지역의 생태계 속도에 맞춰 스며들 듯 움직이는 곳이 됐으면 한다. 그의 뜻대로 세상상회 벽면에는 ‘다양한 로컬콘텐츠를 소개하며 상생의 가치를 담아내는 복합문화공간. 사람과 골목, 골목과 세상을 이어가는 소통의 공간’이라고 적혀 있었다.
가게가 잘되다보니 ‘상업성’과 ‘도시재생의 가치’ 사이에서 고민이 생길 법하겠다.
고민의 지점이다. 하지만 우리 부부는 인생에서 가장 잘나가던 시절에 아파봤기 때문에 욕심의 절제가 가능한 것 같다. 올해 이만큼 벌었으니 내년에는 그보다 더 벌어야지 같은 고민을 하지 않기로 했다. 돈을 더 벌 수 있는 에너지가 있다면 오히려 관아골 주변 친구들과 나누는 게 맞다고 생각한다. 형이 못나도 안되고 형만 잘나도 안된다. 누군가는 관아골이 꾸준히 주목받을 수 있는 역할을, 또 누군가는 동네 갈등을 해소시킬 수 있는 역할을 해야 한다. 그런 점에서 관아골 골목은 전체적으로 안정감을 찾은 것 같아 만족스럽다.
‘이욷: 이웃과 함께 하는 재능기부 프로젝트’로 매장 한 편에 ‘위스키·소비뇽 캔들’을 판매하는 것도 그 일환인가?
뭔가 해보고 싶지만 공간이 없는 나 같은 오지라퍼들을 위해 마련했다. 캔들을 만드는 친구와 술집을 운영 중인 친구의 협업 프로젝트다. 고양이 얼굴이 그려진 굿즈라든지 협동조합 자체적으로 기획한 상품들도 있다. 일부 수익금은 길고양이들 중성화 수술에 보탠다.
지난해 관아골 골목 끝에 독채 스테이를 열었다.
골목을 찾는 발걸음이 쌓이면서 “놀러왔더니 잘 곳이 없다”는 목소리들이 생겼다. 지역활성화 컨설턴트 마인드로 생각해보면 그건 당연하다. 충주는 강릉이나 속초를 다녀오는 길에 배가 고파서, 기름이 떨어져서 들르는 경유형 관광지다. 관광자원이 시외권으로 분산될 수밖에 없다. 시내권 숙박업소가 38개인데 2성급 같은 3성급 호텔 하나를 제외하곤 10년 이상 된 모텔이나 여인숙이다. 결국 또 오지랖을 부린 거다. 문제는 자금이었는데 중소벤처기업부의 ‘강한소상공인 성장지원 사업’에 선발돼 그 예산과 모아운 돈을 합해 독채 파인 스테이를 열었다. 20년 묵은 설거지도 있을 만큼 방치돼 있던 건물이었다. 고생스러웠지만 이 골목에 사람들이 와야 하는 이유를 만드는 게 내 역할이라고 생각한다.
또 다른 빈집 골목을 바꿀 계획은 없나?
없다. 그보단 관아골 안에서 ‘스케일 업(수직적 확장)’과 ‘스케일 아웃(수평적 확장)’의 균형을 맞추는 것이 중요하다. 인테리어 일을 하는 친구가 독채 스테이 바로 앞 빈 벽돌집을 샀다. 올해 안에 멋진 사무공간으로 태어날 예정이다. 구도심 골목 안에서도 젊은 사람들이 멋지게, 도심에서 볼법한 통창 사무실에서 일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다.
뼛속까지 로컬 크리에이터인 것 같다.
대학생 때는 ‘좋은 직장’만 좇았는데 대학원에 가면서 내가 오랫동안 재밌게 할 수 있는 ‘직업’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됐다. 대학원에서 지역 활성화와 관련된 일을 많이 경험했다. 정말 재밌긴 해도 일이 너무 많아서 감내하려면 스스로 ‘이 일이 천직이다’라고 매일 되새겨야 했다. 하다보니 지역 활성화가 내겐 당연한 일상이 됐다. 이젠 진짜 내 체질인가 싶다(웃음).
이근하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