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 영월군 젊은달와이파크
젊은달와이파크의 첫 기억은 강렬한 빨강이었다. 언제부터인가 누리소통망(SNS)을 중심으로 강원 영월군을 해시태그(핵심어 표시)한 멋진 사진이 하나둘 올라오기 시작했는데, 빨강이 배경이라면 열에 아홉은 모두 같은 장소였다. 호기심에 유심히 살펴보니 영월군에 새로 생긴 미술관이었다. 사진명소로 인기를 끌고 있었지만 ‘그 시골에 웬 미술관인가’ 하는 생각부터 든 게 사실이었다.
의아함은 젊은달와이파크라는 조금은 낯선 이름도 한몫했다. 미술관이라면 국립이든 시립이든 소속이나 유명 화가의 이름 석 자 정도는 붙어 있어 배경이 유추되기 마련이다. 그런데 젊은달와이파크라는 이름에선 그 무엇도 짐작하기 힘들었고, 영월군과 연관성은 더더욱 찾을 수 없어 그저 ‘영월, 빨강’ 정도의 키워드로 저장해뒀다. 언젠가 근처에 갈 일이 있다면 남들처럼 유행하는 빨강 배경의 인증사진 한 장 찍어보자는, 조금은 성의 없는 기억이었다. 그런데 이번에 직접 가보고 알았다. ‘영월, 빨강’은 미술관이 의도한 아주 제대로 된 저장 명이었다는 것을 말이다. 누구나 그렇게 영월의 빨강을 찾아 미술관을 방문하고 있었다.
영월 이야기부터 해보자. 단종의 한이 서린 청령포와 장릉, 석회동굴로 유명한 고씨굴, 방랑시인 김삿갓 유적지 등 영월은 관광지가 많다. 한물간 퇴물 가수와 그의 곁을 지키는 매니저의 우정을 그린 오래된 영화 <라디오스타(박중훈·안성기 주연)>의 배경도 영월이었다. 그런데 유명한 것과 인기 있는 것은 엄연히 다른 법이다. 영월이 유명한 관광지냐는 물음엔 “네”라고 답할 수 있겠지만 인기 있는 관광지냐는 물음엔 “글쎄요”다. 영화 속에서도 영월은 사람들이 선뜻 가고 싶어 하지 않는 아주 외진 시골로 그려진다. 그런 영월이 젊은층에게 유명세를 타며 인기 관광지로 거듭나고 있는 것이다. ‘영월, 빨강’이라는 아주 감각적인 키워드를 제공하고 있는 복합예술문화공간 젊은달와이파크를 통해서다.
알쏭달쏭했던 이름부터 예사롭지 않다. 뜻풀이를 보니 영월 그 자체의 이름이다. 젊은달은 영월(寧越)을 ‘영(young)+월(月)’로 새롭게 해석한 한글이었고, 와이파크(Y Park)는 영월의 영문표기(Yeongwol) 첫 이니셜을 붙인 것이다. 이렇듯 젊은달와이파크는 영월이 가진 기존의 다소 올드(old)한 이미지를 과감하게 비튼 이름만큼이나 영월을 영(young)하게 만들고 있었다.
미술관이 된 박물관
젊은달와이파크는 강원 영월군 주천면에 위치해 있다. 영월 읍내에서도 차로 40여 분 떨어져 있는 아주 작은 시골 면 소재지다. 이런 곳에 명소가 들어설 수 있었던 건 기존에 있던 공간을 재활용했기 때문이다. 젊은달와이파크는 원래 술샘박물관이었다. 주천(酒泉)이라는 지명은 ‘술이 샘솟는 마을’이란 뜻으로, 지금도 신일리 비석거리 우측 망산 밑에는 물이 아닌 술이 나온다는 샘터가 있다. 영월군은 이 같은 역사적 유래를 기반으로 2014년 11월 관광객을 유치하기 위해 주천면 일원 2만 6270㎡ 부지에 1324㎡ 규모의 술샘박물관을 개관했다. 그러나 콘텐츠 부족 등으로 고전을 면치 못했고 2016년 지역경제와 박물관 활성화를 위해 먹거리 체험 등이 어우러진 술샘마을주막거리를 추가로 조성했으나 주변 상인들의 반발로 정식 개장도 하지 못한 채 그대로 방치됐다.
그때 이곳을 주목한 이는 강릉 하슬라아트월드 미술관장이자 조각가인 최옥영 작가였다. 그는 오랫동안 하슬라아트월드를 운영해온 경험과 조각가이자 공간기획자로서의 시각을 바탕으로 ‘한국의 나오시마’를 꿈꾸며 지역과 장소를 물색 중이었다. 일본 가가와현 나오시마는 성업하던 금속제련 공장이 폐쇄된 후 쓰레기 섬이라 불렸지만 세계적인 건축가 안도 다다오에 의해 섬 전체가 미술관으로 재탄생한 곳이다. 당시 영월군 역시 술샘박물관의 공간 활용을 위해 전문가를 찾고 있던 터였다.
최 작가와 영월군의 만남으로 술샘박물관의 변신이 시작됐다. 그는 기존 술샘박물관의 구조와 배치는 유지한 채 건물을 품는 붉은 파빌리온(Red Pavillion)과 건물을 잇는 대형 작품, 그리고 새로운 통로를 설치해 흐름을 완전히 바꿨다. 건물 색깔도 옛것은 흰색을, 새것은 빨강을 택해 공간 재생이라는 의미가 퇴색되지 않도록 최소한의 공사를 진행했다. 젊은달와이파크라는 이름처럼 공간에도 영월이 가득 담기길 바랐다. 강원 강릉 출신이기도 한 작가의 바람이 고스란히 담긴 젊은달와이파크는 2019년 6월 새롭게 문을 열었다.
우주가 담긴 공간 속으로
이제 드디어 영월의 빨강 속으로 들어가보자. 젊은달와이파크를 검색하면 화면을 장악하는 빨강 배경의 정체는 바로 최 작가의 ‘붉은 대나무’다. 입구에 설치된 이 작품은 강렬한 색부터 거대한 규모까지 보는 이를 압도한다. 온통 새빨간 칠을 한 금속 파이프 다발이 파란 하늘을 향해 찌를 듯 솟아 있다. 여러 개를 연결한 길쭉한 파이프의 마디마디는 제목 그대로 붉은 대나무다.
강릉의 오죽을 영월의 자연 색인 녹색과 가장 대비되는 빨강으로 표현했다. 작가는 재생공간으로 다시 태어나는 젊은달와이파크의 넘치는 에너지를 보여주기 위해 가장 원초적인 생명을 상징하는 빨강을 선택했다고 한다. 하늘과 구름, 산과 나무, 그리고 마을의 집들과 어울리며 시선을 사로잡는 빨강의 위력은 대단했다. 미술관에 들어가지 않고도 주변을 한 폭의 그림으로 만들어버린다. 특히 출입구 역할까지 하는 작품 속으로 걸어들어가다 보면 마치 현실 세계를 뒤로하고 신비한 미지의 세계로 빨려가는 듯한 몽환적 기분이 든다.
붉은 대나무 군락이 끝나는 지점에 미술관이 나온다. 안으로 들어가면 매표 공간과 카페 달이 있다. 최 작가의 설치작품과 함께 그가 수집한 앤티크 가구가 곳곳에 놓여 있는 아주 감각적인 카페다. 사전 예약자에 한해 카카오 로스팅, 초콜릿 만들기, 커피 핸드드립 등 다양한 체험프로그램이 운영되기도 한다. 젊은달와이파크 관람객이 아니라도 누구나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다.
매표소를 지나면 ‘붉은 대나무’에 이어 또 하나의 대표 작품 ‘목성’(木星)이 나온다. 영월군의 소나무를 겹겹이 쌓아 올린 높이 15m, 지름 12m의 거대한 돔이다. 작품에 들어간 소나무만 무려 200톤으로 사진만으로는 그 규모를 체감하기 힘들다. 직접 안으로 들어가보면 마치 엄마의 자궁 안에 들어와 있는 것 같은 아늑함과 신비함을 동시에 느낀다. 장작 사이사이 무수히 많은 틈새로 들어오는 햇빛이 눈부시게 반짝인다. 천장에는 지름 3m의 구멍이 나 있어 파란 하늘이 그대로 눈에 들어온다. 비가 오는 날엔 바닥까지 물이 찰랑이며 반짝이는데 이게 또 장관이다. 전화(033-372-9411)로 사전 예약하면 요가 매트를 펼치고 스트레칭을 하면서 중앙에 뚫린 구멍으로 별밤보기 체험도 할 수 있다.
목성을 나와 소나무 장작 길을 따라가면 꽃으로 뒤덮인 ‘시간의 거울-사임당이 걷던 길’이라는 제목의 방이 나오고, 옆으로 목수들이 작업하다 남긴 나무 파편들을 모아 원으로 엮어낸 ‘우주정원’이 이어진다. 전시관마다 완전히 다른 분위기의 작품들이 펼쳐져 미술관 관람이 아니라 우주별을 여행하는 듯하다.
재생과 순환의 가치를 품다
최 작가의 상징색이자 젊은달와이파크를 관통하는 세계관을 대표하는 빨강은 실내 전시공간을 지나 외부 전시공간인 두 개의 붉은 파빌리온으로 이어진다. 기다란 통로로 연결된 붉은 강철 파이프의 이 거대한 구조물에는 재생과 순환이라는 공간의 가치와 결을 같이하는 작품들이 곳곳에 설치돼 있다. 수백 개의 폐타이어를 파빌리온 2층에서 1층 바닥까지 늘어트린 대형 에코미술과 공사 후 남은 각진 파이프들로 은색의 정어리떼를 표현한 ‘실버피쉬’ 등이 대표적이다.
붉은 파빌리온Ⅱ 공중에는 그물로 만든 거대한 거미 모양의 ‘스파이더 웹(Spiderweb)’이 매달려 있다. 설치미술인 동시에 놀이·체험공간이다. 별도 이용료(5000원)를 내면 그물 속에 들어가 놀 수 있다. 따뜻한 날이면 그물 속에 누워 솔솔 불어오는 바람을 만끽하는 맛이 그만이다. 아이들도 보호자 동반하에 입장이 가능해 언제나 인기 만점이다.
총 11개 전시관으로 구성된 젊은달와이파크는 이처럼 입구의 ‘붉은 대나무’ 설치미술로 시작해 실내외 전시공간들이 우주를 유영하듯 리듬감 있게 이어진다. 모든 공간이 사진 명소로 손색없을 만큼 개성이 넘쳐서 전시관당 한두 컷만 찍어도 2~3시간이 훌쩍 지나간다. 성인 기준 1만 5000원이라는 관람료가 다소 비싸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워낙 볼거리, 즐길거리가 많아 관람을 종료한 방문객의 만족도는 매우 높다. 또 입장료만 소지하고 있다면 재입장이 얼마든지 가능해 편의성도 뛰어나다.
공간을 이용한 최 작가의 과감하고 감각적인 디자인으로 재해석된 술샘박물관은 ‘영월, 빨강’이라는 키워드로 젊은층을 사로잡으며 젊은달와이파크의 성공을 넘어 영월의 성공까지 이끌고 있다. 개관 1년 만에 관광 분야/부문 수많은 순위에 이름을 올렸다. 오늘도 한 컷의 멋진 인생사진을 찍기 위해 환하게 뜬 젊은달 아래로 사람들이 모이고 있다. 그 어느 때보다 영(young)하게 뜨고 있는 영월로 가자!
강은진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