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대통령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자유민주주의 헌법질서 수호를 강조해왔다. 2022년 12월 대통령 직속 국민통합위원회 보고회에서는 자유민주주의에서 ‘자유’를 삭제하려는 대규모 세력이 존재한다는 우려를 표명했다. 헌법에 자유를 뺀 민주주의를 넣자는 주장은 자유민주주의 체제가 아닌 다른 체제로 전환하려는 의도가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자유민주주의에서 자유는 형용사에 불과하지만 실은 국가 정체성과 관련된 중대한 문제이다.
20세기 들어서면서 민주주의는 거의 모든 국가가 최고 정치·사회적 조직 형태로 선호하고 있다. 심지어 베니토 무솔리니는 파시즘이 “진정한 민주주의의 실현”이라고 했고 아돌프 히틀러도 나치즘이 “근대 민주국가의 가장 고귀한 형태”라고 했다. 블라디미르 레닌 역시 “인민민주주의는 부르주아 의회민주주의에 비해 새롭고 더 높은 형태의 민주주의”라고 강변했다. 술탄주의(sultanism) 국가를 제외하고는 반민주적 정치 교의를 표방하는 국가는 없다. 단순히 민주주의만을 표방한다면 그 국가의 진로는 모호할 뿐이다.
본래 민주주의는 누가 통치해야 하는가에 대한 물음에서 비롯된 통치 유형의 하나로 고대 그리스 도시국가 때부터 정치적 사유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자유주의가 뿌리를 내리는 19세기까지는 대체로 경멸적인 의미를 내포했다. 민주주의의 원조인 아테네에서 살았던 플라톤은 민주주의에 적대적이었고, 그의 제자 아리스토텔레스도 무지하고 가난한 사람들이 선동정치에 취약해져 중우정치(衆愚政治)에 빠질 위험이 있다고 지적했다.
민주주의가 인민 주권의 근대적 의미로 주목받게 된 것은 자유주의와 접목하면서부터다. 자유주의는 특히 영국의 경우 국가 구속으로부터 자유를 의미했으며 절대주의 국가의 신성 권력에 도전했다. 최초 자유주의자인 토머스 홉스(1588~1679)는 국가의 주권은 “자유롭고 평등한 개인들이” 전쟁 상황의 자연 상태로부터 평화와 안전을 보호받기 위해 상호 동의하에 개인의 권리를 양도한 사회계약으로 형성된 절대적 권위의 공권력(Leviathan)이라고 설파했다,
존 로크(1632~1704)는 개인들이 평화롭고 안락한 생활을 보장받으려면 스스로 주권을 가져야 한다는 인민주권론을 주장했다. 자유주의의 챔피언인 로크는 개인들의 집합체인 사회는 국가 이전에 존재했고 국가는 시민의 자연권(생명, 자유, 재산)을 보호하기 위한 ‘도구’로서 만들어졌다고 했다. 따라서 국가의 존재 이유는 개인의 권리 보호이며 사회적 동의에 의해 정통성이 부여됐으므로 사회계약을 어길 때는 정부를 바꿀 수도 있다고 했다.
그러나 로크는 대의제 정부의 ‘민주적’ 요소를 간과했다. 경쟁 정당과 정당 통치 그리고 계급, 성별, 인종, 신념에 관계없이 누릴 수 있는 정치적 자유를 배제했다. 정기적인 선거와 보통선거에 대한 것, 시민생활에 대한 국가 개입의 한계와 시민불복종 운동의 정당화 조건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도 없었다. 로크는 위대한 자유주의자였지 민주주의자는 아니었다.
자유주의와 민주주의를 결합한 것은 공리주의(utilitarianism)였다. 제러미 벤담(1748~1832)과 제임스 밀(1773~1836)은 통치자가 피치자에게 책임을 지는 정치적 제도가 마련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공공이익(다수 개인의 이익)에 부합하는 정치적 결정을 선택하고 통제할 수 있는 수단을 갖추기 위해서는 민주적 정부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는 오로지 비밀투표, 정치지도자(대표자) 간의 경쟁, 주기적 선거, 권력분립, 언론과 표현 및 결사의 자유를 통해서만 공동체의 이익을 달성할 수 있다고 했다.
이러한 정부의 목적은 공리(utility)의 원칙(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에 의해 행동하는 것이다. 공리 또는 공동선은 최저생활 보장, 풍요 산출, 평등 추구, 안보 유지인데 이중 안보가 가장 중요하다. 이들은 자유민주주의 국가는 개인들이 임의적인 정치적 개입 없이 자신들의 이익을 추구하고 경제적 거래에 자유롭게 참여하며 시장에서 노동과 재화를 교환하고 사적으로 자원을 전유할 수 있도록 필요조건을 확립하는 것이라고 정의했다. 공리주의는 자유주의와 달리 공리를 위해 사회관계와 제도를 재정비하기 위한 국가의 개입을 정당화했다.
자유민주주의 이론은 밀의 아들 존 스튜어트 밀(1806~1873)에 와서 더욱 발전했다. 아들 밀은 자유민주적 대의제 정부는 개인의 만족 추구와 개인성(individuality)의 자유로운 발전 측면에서 중요하다고 여겼다. 정치생활의 참여(투표, 지방행정 관여, 배심원 봉사 등)는 정부에서 직접 이익을 창출하는 데 매우 중요하고 시민 참여 의식과 지식을 개발하는 기반을 제공한다. 밀은 <자유론(1859년)>에서 자유민주 정부는 세 가지 자유를 보장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사상, 감정, 토론, 출판의 자유 ▲취미와 일의 자유 ▲결사의 자유이다. 물론 이러한 자유는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한도 내에서다. 그러므로 대의제 민주주의는 자기 정체성과 개인성 그리고 사회적 다름(다원주의 사회)을 발전시키는 수단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밀 역시 정치평등 원칙에 관해서는 부족했다. 밀은 모든 성인은 투표권을 가지나 지혜롭고 능력있는 사람이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더 많은 투표권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하고 직업·지위에 따라 투표수 할당을 제안했다. 자유민주주의가 보통선거제 도입을 통한 정치평등을 이루는 데는 19세기와 20세기 대부분이 소요됐다. 노동자 계급, 여권주의자, 흑인 민권운동가들은 참정권을 쟁취하기 위해 끈질긴 투쟁을 전개했다. 미국 흑인은 1965년에야 참정권을 온전히 획득했고 스위스 여성은 1970년까지 기다려야 했다.
한국은 1948년 5·10 제헌국회 선거에서 보통선거를 했지만 제도만 채택한 것이었지 자유민주주의 체제 실현과는 거리가 멀었다. 한국 정치의 불안정성은 국가의 정체성에 대한 합의가 이뤄지지 않았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다. 이제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대안을 찾는 모험적 시도에 함몰되기보다 한국 나름의 자유민주주의를 모색하는 것이 훨씬 현실적으로 타당할 것이다.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명예교수. 한국정치학회장을 역임했으며 통일부 정책자문위원회 위원장, 연세대 행정대학원장, 국가관리연구원장을 거쳤다.